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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자본에 ‘뉴딜’은 없다

등록 2006-08-18 00:00 수정 2020-05-02 04:24

노동의 저항을 포섭하지 못하고 저임금과 특혜만 요구하는 한국 자본… 장래를 보고 투자하는 ‘인내하는 자본’이 없는데 뉴딜을 어떻게 하나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929년 대공황 직후 루스벨트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내놓았다. 자본 쪽으로부터 뉴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루스벨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기준”이라는 말로 일축하고 7년간에 걸쳐 뉴딜을 더 강력하게 추진했다. 뉴딜은 산업 부흥 정책도 담고 있었지만 ‘잊혀진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하고 최저임금과 최장 노동시간 규정을 도입했다.

따라서 안정된 고용·임금을 확보하게 한 뉴딜을 ‘실질임금 상승을 통한 노동 포섭’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케인스가 주장한 국가 개입 정책을 받아들이고 자본-노동 간 타협을 추구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방향을 바꾼 대전환점이었다. 뉴딜 이후 자본주의는 1970년대 초까지 황금기를 구가했다.

김근태의 뉴딜, 멍석만 깔아주기

요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뉴딜’을 외치면서 전국 곳곳에 ‘뉴딜 투어’를 다니고 있다. 김근태식 뉴딜 구상은 “정부가 규제 완화를 통해 멍석을 깔아줄 테니 기업가들이여, 마음껏 춤춰라(설비투자를 확대하라)?”는 말로 집약된다. 루스벨트의 뉴딜이 대자본가들의 비판에 직면했던 반면, 김근태식 뉴딜에 국내 기업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정부가 먼저 ‘모범적 사용자’의 역할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정부는 최근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5만4천 명을 2007년 초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경제단체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며 즉각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정부가 이번 조처를 앞세워 민간기업에도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거나 압박할 생각이었지만, 허황한 기대에 그칠 공산이 크다. 생계임금 확보나 주5일 근무 같은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불만조차 포용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에 빠진 자본이 정부의 뉴딜에 화답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수 있을까?

자본의 무능은 여기저기서 수많은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기술혁신은 뒤처지고 오직 인건비를 짜내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일수록 비정규직 확대에만 매달리기 일쑤고, 파업이 벌어졌을 때 노동과 타협할 역량은 극히 제한된다.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노동분규는 이처럼 자본의 무능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한국의 자본은 조직적 노동 소요로부터 안식처를 찾으려고 ‘노동 유연화’만 부르짖을 뿐 노동의 저항을 물질적으로 포섭할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싸움은 대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데까지 충분히 멀리 나아간다. 그래야 가능한 것이라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요구가 과도하게 분출했기 때문에 자본의 능력이 한계에 부닥치고 있는 건 아니다. 루스벨트가 도입한 최저임금을 보자. 국내 사용자들은 최저임금 몇 푼 올리는 것조차 해마다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 높은 최저임금이 일할 유인을 증가시키고 결근과 이직률을 낮춰 생산성 향상을 자극한다는 점은 생각조차 않는다. 저임금 경제에서 고임금 경제로 이행하고, 노동자에 대한 투자를 늘려 이윤을 확대하는 이상적 모델은 ‘다른 국가들의 유형’일 뿐이다. 이런 자본의 취약함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른다.

무능한 자본일수록 국가에 ‘더 많은 특혜’를 요구한다. 김근태식 뉴딜은 법인세 감면 같은 자본에 대한 인센티브를 과감하게 던져주겠다는 선언이다. 노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약속도 없다. 다만 자본이 투자를 늘리면 자연스럽게 고용이 창출돼 노동이 혜택을 향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을 뿐이다. 한국 임금노동자들의 연간 실근로시간은 2380시간(2004년)으로 세계 최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22개국 평균(1700시간)에 견줘 지나치게 높다. 이처럼 노동시간 증대와 임금 삭감만을 추구하는 자본한테서 뉴딜적 타협을 기대할 수 있을까. 로버트 브레너는 에서 1980∼90년대를 ‘저임금 경제의 부상’으로 규정했다. “민간기업의 지속적인 이윤 획득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임금의 정체뿐이었다. 즉, 어떠한 실질임금의 성장도 포용할 수 없는 (자본의) 무능력이었다.”

여성 노동력 활용은 비정규직뿐

우리나라 여성 취업자는 지난 6월 991만 명으로 1천만 명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여성 노동력 활용에서도 자본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상품시장 변화로 디자인이 강조되고 ‘제조업의 소프트화’가 진전되면서 여성적 감성과 상상력이 상품의 개발·판매에서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여성 활용은 오직 저임금 여성을 활용하는 데 그치고 있다. 회사 안에서도 그 여성이 맡고 있는 일이 뭐든 간에 커피를 타주면서도 싫은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되고, 다방 여종업원처럼 피곤한 심신을 위로해줄 상냥한 태도를 보여야 일을 제대로 한 여직원으로 평가한다. 여성 직종만 봐도 교사·간호직을 빼면 여성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드물고, 할인점·백화점 판매직처럼 거의 대부분이 저임금 비정규직일 뿐이다.

케인스는 기업가의 ‘야성적 혈기’(animal spirit)를 언급한 대목에서 “먼 장래에 걸친 희망에 의존하는 기업은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 기업의 야성적 혈기는 수량적 확률 같은 합리적 타산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분위기에 크게 의존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위험은 감수하지 않고, “이윤은 우리가 차지할 테니 위험부담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달라”는 식이다. 먼 장래의 희망을 보고 투자하는 ‘인내하는 자본’은 찾아볼 수 없다. 뉴딜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케인스는 위기에 직면한 자본을 구하는 데 필요한 치유책을 제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뉴딜은 체제를 지키려는 ‘자본가들의 개혁’이었다. 혁명가야 “자본의 위기는 노동의 희망”이라고 외치겠지만, 자본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노동의 요구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을 회복해야 노동자들도 투쟁을 접고 평온할 수 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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