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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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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정규직 공약은 없는가

등록 2006-05-19 00:00 수정 2020-05-03 04:24

2년 넘게 법안이 논의되고 있는데도 지방선거의 쟁점조차 되지 않아… 정치권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문제에 대해 노무현 정부도 침묵뿐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뉴질랜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한 국가 중 하나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가 들어오면서 남녀 모두 파트타임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었고, 뒤이어 비정규직의 저임금·고용불안이 ‘노동문제’로 제기됐다. 이런 뉴질랜드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1999년 선거를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99년 10월 선거에서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평등한 권리 보장이 핵심 선거 쟁점으로 부상했고, 비정규직 보호를 성공적인 선거 캠페인으로 내건 연합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부는 집권 직후 공약에 따라 노동시장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2000년에 새로운 고용보호법을 제정해 주로 비정규직한테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고, 임금·고용 조건도 향상됐다.

민주화 세력일 뿐, 노동 세력은 아니다

요즘 전국이 5·31 지방선거 열기로 뜨겁다. 그런데 비정규직 법안이 2년 넘게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음에도 이번 선거에서 ‘비정규직 쟁점’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만이 “서울시와 산하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업체는 각종 입찰에서 제한을 두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집권 여당도 제1야당도 비정규직 문제는 전혀 꺼내지 않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56%가 비정규직인 만큼 비정규직 문제가 선거 쟁점으로 불거지면 상당한 수의 표를 움직일 수 있는 이슈가 될 것 같은데,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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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사실 노무현 대통령도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한 적이 없다. 대공장 노동자의 집단이기주의와 ‘양극화 해소’는 틈만 나면 지적하면서도 정작 15만V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는, 절박한 여러 비정규 노동자 투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친노동’ 정권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노동세력’은 아닌 데서 오는 한계일까? 누군가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해찬 전 총리·유시민 장관 등은 1987년 시점에서 보면 당시 6월의 직선제 개헌 쟁취를 내건 정치적 민주화 세력일 뿐 7∼9월 노동자 대투쟁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은 그룹에 속한다. “민주주의를 달성하면 한국 사회의 많은 모순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을 뿐 ‘노동의 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세력이란 것이다. 사실 참여정부 초기 노동운동이 노무현 정부의 외곽 조직이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은 노동계가 참여정부 퇴진까지 외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노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물질적·조직적 힘을 가진 세력이 더 이상 아니다”며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는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걸린 현실 문제다.

프랑스에서는 최근 비정규직 고용을 담고 있는 최초고용계약(CPE) 입법이 학생·노동자 등 민중의 광범위한 저항 물결에 직면해 철회됐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직업으로 이행할 때 당장 자신들에게 닥칠 문제인데도 비정규직 문제를 내걸고 총궐기하거나 집단적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민주노동당은 요즘 프랑스에서의 승리를 보고 난 뒤 비정규직 싸움에 대학생 동원을 조직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지역주의 투표 행태를 보이거나 선거에 불참하고 예비 노동자(대학생)들도 침묵하는 상황에서는 정치인들이 비정규 노동 문제에 신경쓸 리 없다. 사실 한국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높은 불만과 대립 의식을 갖고 있지만, 교육과 분단 이데올로기 때문에 정치적 주체로 자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거나 “진보 정당은 보나 마나 실패할 것”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에 갇혀 있다.

물론 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와 노동기본권 인정을 쟁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웠던 것처럼 이제는 비정규 노동자 스스로 조직화하고 자신들의 이해를 반영시켜야 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비정규직은 개별화·파편화돼 사용자에 대항해 싸우기도 어렵고, “노동자도 아닌데 무슨 노동기본권”이냐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말만 그럴듯한 도급·하청 형태의 ‘특수고용’(학습지 교사·보험모집인·레미콘 기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자율적으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업무 지휘·감독을 받고 자본의 지시에 따라 포섭되거나 방출되는데도 오직 신분상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노동자도 아니고 사용자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용자들이 책임과 의무를 ‘도급·하청’이란 이유로 은폐하고 있지만 이들도 한 사회의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엄연한 노동자임이 틀림없다. 대통령이, 정당이 ‘새롭고 복잡한’ 노동의 출현에 관심을 갖고 적극 개입하고 제도적으로 적절한 보호규제를 도입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

비정규직은 새로운 대안적 노동의 세계도 ‘멋진 신세계’도 아니다.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장기적인 비용·편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비정규직 활용이 마치 선진적인 인사관리 기법이라면서 전염병처럼 비정규직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값싼 비정규 노동력은 기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낳는다. 국내 종업원 50명 이상 180여 개 기업의 비정규직 비율과 2002년 경영 성과를 비교 분석한 한 연구를 보면, 비정규직 비율이 높을수록 노동생산성도 영업이익률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차별받는 노동자들이 과연 기업에 헌신하고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토머스 홉스는 “전쟁의 본질은 실제 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걸쳐 확실성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의 생애도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사용은 살아남은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신뢰를 깨뜨리고 조직 응집력을 파괴해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핵심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사회’이다.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명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도 비정규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일까?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노예가 아닌 것처럼 현재 ‘추세’의 노예도 아니다. 우리가 하고자 한다면 어떤 가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로버트 라이시·미국 전 노동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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