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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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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률 3.4%의 함정

등록 2006-09-16 00:00 수정 2020-05-03 04:24

‘낮은’ 수치의 이면엔 청년·대도시 저소득층·저학력자들에 집중된 고통이… 실적에 급급한 기업들은 상시 구조조정에 나서고 ‘좋은 일자리’는 사라져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약 2300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출근하는 나라에서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는 100만여 명의 건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2006년 7월 현재 공식 실업자는 82만3천 명(실업률 3.4%,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이지만, 이른바 ‘실망실업자’까지 합치면 100만 명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실업률이 2∼3%대이면 거의 완전고용 수준으로 본다. 경기적 요인 외에 일자리 탐색 기간 등 여러 가지 기술적·구조적 이유로 ‘불가피한 실업자’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실업률은 큰 골칫거리가 아닌, 안정적 수준임이 틀림없다.

성장해도 고용은 늘지 않는다

하지만 통계수치는 자칫 숫자의 미궁에 빠져들게 해 전체적인 진실을 감추거나 현실의 체감 수준을 크게 떨어뜨리기도 한다. 실업률 3.4%라는 ‘낮은’ 수치와 실업자 100만 명(!)은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전체 평균실업률과 나이·학력·지역별 실업률도 큰 격차가 있다. 20∼29살 청년 실업률은 7.8%(35만1천 명), 대부분 한 가족의 가장인 30∼49살 실업자는 32만9천 명이다. 고졸 실업률은 4.1%, 서울·부산·인천·대전 등 대도시 실업률은 4.2∼4.7%로 전체 평균 실업률보다 더 높다. 실업은 청년, 대도시 저소득층, 저학력자들에게 집중된다.

1997년 10월 ‘부츠 앨런 & 해밀턴’사의 보고서는 한국의 공식 실업률은 2%대지만, 유보실업률은 9%라고 지적했다. 여기서 유보실업이란 외국과의 비교에서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음에도 국내 시장 보호장벽 때문에 감추어져 있는 실업을 뜻한다. 대규모 불안정고용 비정규직, 그리고 실직 이후 식당이나 구멍가게를 차렸지만 돈만 까먹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사실상 9%의 실업자군을 현재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주와 무급 가족 종사자(월급을 받지 않고 가족 일을 돕고 있는 취업자) 등 비임금 근로자는 601만 명(2005년)에 달한다. 이런 자영업자 중 상당수는 사실상 실업자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대통령은 “3명이 정리해고 고통을 감내해주면 살아남은 7명이 공장을 일으켜세워 몇 년 뒤 10명 모두 같이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케인스가 말했듯 “장기에, 우리는 모두 죽고 없을 것이다”. 나중에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말은 실업자들에게 결코 위안이 될 수 없다. 21세기의 실업은 더 이상 경기 후퇴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은 경기 확장기에도 전략적으로 상시 고용조정에 나서고 있다. 주주자본주의와 단기 이윤추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기업들은 비용절감을 위한 고용조정 성과를 시장에 보여줌으로써 다른 기업과 차별화된 ‘혁신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이를 통해 주주들의 투자를 끌어들이고 더 많은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한다. 2001년 2월 영국의 철강업체인 코러스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6천 명의 노동자를 감축하자 이 기업의 주식 가격은 즉시 9%나 치솟았다.

자본이 대대적인 인력감축을 단행해 회사의 기업가치를 높인 뒤 인수·합병(M&A) 시장에 내놓아 높은 가격에 팔아버리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단기 성과주의’에 빠진 신자유주의 자본의 운동논리 때문에 실업의 공포와 불안이 만연한 사회다. 맑스는 에서 똑같은 기계가 더 싸게 생산되거나 더 나은 기계가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게 되면 기존에 공장에 설치했던 기계는 물리적 마멸 외에 ‘도덕적 가치 감소’를 겪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정해진 수명보다 훨씬 빨리 기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그 기계에 달라붙어 일하던 노동자들은 실업 위기에 빠지게 되다. 바꿔말해 자본 간의 기술혁신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유망사업에서든 한계사업에서든 대량의 실업자가 배출될 수밖에 없다. ‘고용 없는 성장’과 ‘고용 회복 없는 경기 회복’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분노, 자괴감 그리고 죽음

외환위기 이후 30대 재벌기업과 공기업, 금융산업과 같은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는 1999∼2002년 사이에 29만 개나 줄어들었다. 지난 6월 기아차 광주공장 신규채용 때 취업원서를 받으려는 긴 줄이 1km를 넘어 장사진을 이뤘다. 이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공장 노동’을 원할 정도로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노동자들의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조차 햄버거 산업의 ‘맥잡’(Mcjobs)처럼 파트타임·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뿐이다. 특히 한번 회사에서 떨려나간 실업자는 새로 일자리를 잡더라도 이전보다 근로조건이 훨씬 더 낮고 노동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고, 따라서 다시 해고돼 실업자 신세에 빠질 공산도 크다.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면서 이들은 사회침전계층(Underclass), 즉 일종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게 된다.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일은 사람의 생애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는 죽어가는 환자들과 흡사한 병리적 증세를 보이게 된다. 처음에는 동료나 고용주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폭발시키지만 실직이 장기화하면서 분노를 내면화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극도의 수치심과 자괴감을 경험한다. 자포자기라는 심리적인 죽음 끝에는 실제 죽음이 뒤따른다. 청년 실업자들은 범죄나 마약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미국의 실업률이 유럽보다 낮은 이유는, 노동시장이 유연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혀 있어 경제활동인구 통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내 교도소 수감자는 210만 명(2002년)으로 전체 국민의 거의 1%에 이른다. 정리해고를 겪고나면 희생자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노동자들 사이에도 불안이 팽배해지고 동료들 간에 서로 비난하는 조직문화가 나타난다.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인력감축을 단행한 기업마다 조직 응집력이 떨어지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폐해가 계속 누적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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