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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의 노동, 끝은 어디인가

등록 2006-11-03 00:00 수정 2020-05-02 04:24

‘유연화 공세’ 뿐 아니라 고용 형태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사회… 노동이 분열된 자본주의에서 유일한 계급은 자본 뿐일지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895년 일리노이의 스프링밸리 탄광의 300명의 광부들은, 그들과 가족에게 편안한 주택·음식·의복·난방이 주어진다면 임금포기 협정에 서명하겠다고 광산 소유주에게 제안했다. 광부들은 1892년 이래 기초생활 필수품이 결핍되었으며, 이런 조건에서 계속 사느니 차라리 노예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쉬잔 브뤼노프의 중에서)

‘특수고용’이라는 위장된 자영업자들

지금이야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저임금을 견디다 못해 “노예 신세로 떨어지는 것도 감내하겠다”고 할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 대 80’으로 상징되는 불평등 심화는 전반적으로 ‘궁핍화 경향’이 사회에 재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 대전 이후, 그리고 68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의 힘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러자 1970년대 말 이후 자본은 “이젠 자본이 굶어죽을 것만 같다”고 한탄하면서 노동에 대해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노동에 대한 규율과 통제력을 회복하려고 임금과 고용에 ‘경직성’이라는 딱지를 붙인 뒤 이 경직성을 파괴하는 ‘유연화 공세’에 나선 것이다.

자본은 임금·고용의 유연화뿐 아니라 고용 형태도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화물·덤프·레미콘 기사, 학습지 교사, 보험모집인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국내 약 200만 명 추산)이다. 자본은 공장 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특수고용’이라는 위장된 자영업자들을 만들어냈다. 화물 노동자들은 10∼20년 전만 해도 정규직이었으나 지금은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한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자본은 자신이 떠안아야 할 경제적 위험까지 특수고용이란 형태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전가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지나 활동이 아닌, 자본의 운동에 따라 장악되고 풀려나며 내던져지고 또 추방된다.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가 있다고 헌법은 선언하지만, 제도적으로 보장된 고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한 폴 라파르그는 “노동은 인류를 내몰아온 채찍 중 가장 가공할 만한 채찍”이라며 “노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쁜 버릇이 마치 악마처럼 노동자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불로 숨쉬고, 결코 지치지 않는 철로 된 팔다리를 가진 기계는 쉼없이 경이로운 속도로 온순하게 신성한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기계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여가와 자유를 마련해줄 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는 인류의 봉사자로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기계에 달라붙어 일하려는 노동자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고, 풍부한 실업자군은 저렴하고 규율 갖춘 노동력을 충분히 공급하도록 강제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옛 숙련공 시대처럼 노동조합이 노동 공급을 ‘독점’하고, 이를 무기로 자본과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노동시장은 더 이상 없다. 특수고용이 보여주듯, 자본은 진정한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서도 개별화되고 취약한 노동인구를 창출해 노동 지배를 더욱 강화한다.

미국노동통계국(BLS)이 한국·미국·일본 등 주요 14개 국가를 비교한 결과 한국의 제조업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004년에 12.1%(전년 대비)로 가장 높았다. 복지가 취약한 한국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려면 예전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일까? 분배 몫을 둘러싼 갈등에서 노동조합은 ‘생계비에 기초한 임금’을 요구하는 반면, 자본은 ‘생산성’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가져가야 한다면서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노동생산성에 기초해 임금률이 정해진다 해도 임금 인상 수준은 ‘인플레이션 초래를 막고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로 다시 억제된다. 반면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노동조합 임금 프리미엄’은 크게 줄어들었거나 무력화되고 있다.

왜 노동자들이 KTX 여승무원을 욕하나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계급’은 자본뿐일지 모른다. 노동자에게 계급은 추상적 단어에 불과하고, 노동자들은 분열돼 있다. 자본은 ‘내부 노동시장’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제한된 일부 노동인구에게만 ‘보장임금’을 줘 특권화시키고, 노동시장을 ‘분단화’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 자본은 그 탄생뿐 아니라 확대재생산 과정에서도 추악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예전에는 자본이 시장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선물로 줘 헌신을 이끌어냈다면 지금은 노동자들끼리 서로 감시하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유연화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철도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지금껏 250일 넘게 싸우고 있는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의 사례를 보자. 스스로 노동자인 많은 사람들이 철도공사의 ‘불법 파견’에는 눈감은 채 “남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얻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KTX 여승무원들은 머리띠 두르고 얻어내려 한다”며 차가운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사실 개인주의와 성과주의를 앞세운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희생자와 패배자들까지도 매혹시켜왔다.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자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온 원천이다. 또한 자본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원천이다. 즉, 노동은 자본이고, 자본은 노동이다. 중요한 건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관계’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유토피아가 아니더라도 자율적인 노동과 자유로운 노동은 얼마든지 꿈꿀 수 있다. 누군가는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노동의 자유와 희망’을 내걸고 노동이 저항하고 있지만 흡사 물에 젖은 장작처럼 좀체 불붙지 못하고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시대에 노동의 저항은 과로(過勞)한 ‘시지프스의 노동’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

* ‘조계완의 노동시대’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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