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아 소설가· 지은이
지난봄 생일날 남편이 “선물이야” 하며 두툼한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선물이라고 건네준 것이 어째 겉모양새부터 수상쩍었다. 초록색 양장본으로 된 겉장은 돌에 찢겨 심하게 파손되었고 종이는 빗물에 얼룩져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그냥 봐도 어디서 마구 굴러다니던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걸 선물이라고 주다니. 실망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노트를 펼쳤다. 볼펜으로 휘갈겨쓴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그건 어느 항해사의 일기장이었다.
13년 전 기록이 왜 내 손에 왔나
일기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12월에 시작해서 1년가량을 쓴 것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인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뭍에 두고 원양어선에 승선 중이었다. 수에즈 운하부터 아랍 분쟁지역까지 그가 탄 배는 세상 곳곳을 제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내내 두고 온 가족과 집을 그리워했다.
딸아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곁에서 지켜주고 돌봐주지 못함을 진정으로 가슴 아파했다. 생활도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남의 사생활을 들춰본다는 것 자체가 찜찜한 일이었지만 일기를 읽는 동안 잠시 행복했다. 그리고 곧 우울해졌다. 이런 소중한 기록이 왜 내 손에까지 들어와야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지금 공사 중이다. 아니 해체 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몇 해 전 뉴타운 발표가 나자 사람들은 무슨 돈방석에라도 올라앉은 양 떠들어댔다. 여태껏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동네는 작은 창고 하나 개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땅값은 물론 서울특별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밑바닥을 맴돌았다. 당연히 거래다운 거래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이사를 가고 싶어도 살고 있는 집을 팔아서는 다른 곳에 가서 전세조차 얻을 수 없는 지경이라 사람들은 그저 공기 하나 좋다는 것을 위안 삼아 눌러앉고 또 눌러앉았다.
그러길 30여 년 그렇게 고대하던 그린벨트를 풀어줍네, 하면서 들고 나온 게 뉴타운이다. 리조트 같은 생태도시를 만든다나. 그 발표가 나기 전부터 동네에는 낯선 승용차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강남의 복부인들이 부동산 중개인을 앞세우고 땅을 보러 다녔다.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목청 높이던 아저씨, 아줌마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진 빈집들이 늘어나고 동네 사람들은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외면했다. 삶의 가치와 정서가 흔들렸다. 그래도 개발하면 좋잖아~. 처음에 반대를 하던 사람들도 차츰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보상을 받아서 새로 지어진 고급 빌라에 입주할 수 있는 세대가 과연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나마 제 집이 있거나 평수가 넉넉한 집은 사정이 낫다. 작은 평수에 사는 세입자들은 그 돈을 받아서 갈 곳이 없다. 물론 임대주택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사람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곳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자연친화적이고 생태적이다. 동네 바로 위로 북한산이 펼쳐지고 실개천에는 아직도 물고기들과 올챙이가 꼬물거린다. 이보다 더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어디 있겠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자연친화이고 생태인가. 집은 리조트가 아니라 땀냄새 풍기는 터전이다. 아파트 숲에 나무 몇 그루 심고 물고기 몇 마리 풀어놓는다고 생태도시가 되는가. 도시의 미관을 위해, 그럴싸한 미명 아래 이 터전에서 쫓겨난 자들은 또 어디에서 웅크리고 있을까. 진정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콘크리트 더미, 뉴타운 개발의 비극
송두리째 사라지는 동네가 안타까운 남편은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를 샅샅이 살피고 다녔다. 퇴근길에 술 한잔 마시던 자리도, 수도 없이 지나다니던 길도 모두 지워지고 사라졌다. 어느 날 남편은 옹색한 터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일기장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일기장의 주인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따져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데다가 그는 지병까지 앓고 있었다. 그런 소중한 기록이 그렇게 함부로 굴러다니고 내팽개쳐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듯싶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그리던 집은, 그 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대신 누가 그의 집을 지켜주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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