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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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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연설

등록 2006-07-29 00:00 수정 2020-05-03 04:24

▣ 임경선 칼럼니스트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가고 있는데 두 명의 대학생이 이쪽 칸으로 건너오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은 마침 대규모 집회가 있던 날이었다. 두 학생은 열정적으로 한미 FTA를 힘 모아 막자고 상기된 얼굴로 승객들에게 호소했다. 옥에 티(?)라면 그들이 나란히 미국산 브랜드의 로고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큼직하게 박혀 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물론 그 코미디는 우리 모두의 몫이자 책임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반FTA 대학생들

쉴 새 없이 목청 높여 규탄하는 것에 반해 승객들은 썰렁한 반응이었다. 늘 하던 대로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대중교통 시설 내에서는 가급적 소음을 내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한미 FTA가 왜 정말 몹쓸 짓이고 왜 미국 놈들이 악질적인지 내게만이라도 차근차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제국주의니 종속론이니 무능한 정부니 하는 얘기는 이미 십수 년간 귀 아프게 들어왔던 레퍼토리다 보니 좀 다른 얘기를 듣고 싶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그 학생들이 말하는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말은 많지만 내용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그들에게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한미 FTA 사안이 언론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관심이 안 갔다. 다만 지하철에서 겪었던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집에 가서 밤새 인터넷 검색을 했다. 두 개의 포털 사이트에서 대부분의 글을 읽었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특성 탓도 있겠지만 대부분 현란한 빨간색으로 밑줄 그어가며 저항 논리를 펼치는 글들이었다. 내용은 서로 비슷했다. 아까 그 대학생들이 말했던 “어쨌든 이래서 나쁘고 우린 이렇게 망할 게 뻔하다니까요”의 인터넷판이다. 분개에 찬 FTA 반대 글들 사이로 간혹 FTA 찬성의 변들이 섞여 있었다. 상대적으로 점잖은 어투 탓에 분위기상 더 논리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잠시, 정부의 FTA 관련 입장을 보니 과장하자면 비굴한 것은 물론이며 그들은 약장수 같았다. 특히 “소신과 양심에 따른 결단”이라는 대통령의 말은 일부 극단적인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관념적이고 고로 모호했다. 뿐만 아니라 자만으로 들린다.

이슈에 대해 무지하고 정보가 부족한 사람의 입장에서 양쪽 입장을 일차적으로 골고루 들어보려 하지만 왜 두 입장 모두 ‘내 편 들래, 네 편 들래’식의 ‘도 아니면 모’식의 제로섬게임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어중간하게 머뭇거리다가는 양쪽에서 다리를 찢어갈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떠한 논쟁적인 이슈에도 극단적이고 절대적인 진실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다. 개방이든 보호든 다 장단점이 있는 법인데 일방통행의 울부짖음이 한 차례씩 끝나고 나면, 그 다음 단계의 토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제대로 소통해서 좀더 나은 방안을 강구하려는 자세 하나 없이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끝내는 정치인들의 토론이다.

극과 극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잘해보려는 마음이 없는 건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부족한 건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견해가 100% 옳다고 믿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의 것이 그 이유라면 참 무서운 일이다. 더불어 갈등관계에 중독돼버리거나 갈등관계에 식상해서 눈을 돌려버리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아직도 나는 내가 찬성의 입장인지 반대의 입장인지 모르겠다. 나처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을 것이다. 어쩌면 국민적 합의는 지지를 얻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이 현안을 투명하고 깊게, 이해하기 쉽게, 국민에게 알리고 있는지에 달렸다. 좀더 진일보된 협의를 제시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극과 극으로 갈려진 사람들의 중간에 다리를 놓아주어 오는 가을엔 더 성숙된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자신 있게 선수들이 협상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금 이상으로 천편일률적인 반미-친미의 이념적 공방이 토론의 장을 점거해버리면, 그 자체의 소모성으로 인해 이미 한국은 진다.

*임경선씨는 이번주를 끝으로 ‘노 땡큐!’를 떠나 새 칼럼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소설가 조영아씨가 ‘노 땡큐!’ 필진에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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