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경선
요새 신경을 쓰이게 하는 한 소녀가 있다. 동네 여자중학교 하교 시간과 겹치는 강아지 운동시키는 시간에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삼삼오오 다니는 발랄한 여중생들 중 한 명을 본다. 눈망울이 유난히 크고 검은 그녀는 아랍계인 듯했다. 아무리 주한 외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라지만, 한국 학교 교복을 입은 외국 아이를 보긴 처음이다. 어쨌든 그 시끄러운 여중생들 가운데 그녀는 늘 혼자 과묵히 다녔다. 벌써 대여섯 번 그녀의 모습을 보나 보다. 뜬금없이 옛날 생각이 났다.
반장의 권력, ‘쪽바리’라는 트라우마
태어나서 내가 처음으로 익힌 언어는 일본어였다.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 일본에 가서 살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보냈는데,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도 일본 학교에서 그 흔한 ‘이지메’를 안 당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겠다.
그러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귀국해서 할아버지로부터 회초리 맞아가면서 속성 코스로 난생처음 한글을 깨우쳤다. 담임선생은 배려 차원에서 일부러 반장(당시 초등학교 반장은 꼭 남자애, 부반장은 여자애였다)을 짝궁으로 점지해주셨다. 시험 때는 짝궁의 답안지를 그대로 베껴쓰라고 하셔서 너무 충실히 베끼는 바람에 이름까지 베껴써서 반 아이들을 웃긴 적도 있었다. 창피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한글 실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괜찮지 않았던 것은 실은 내 짝궁이었다. ‘외국에서 온 아이’라는 것 때문에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접근했을 때, 반장은 학급의 인기스타를 독점한 것처럼 애들 앞에서 나를 챙겨주며 매니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 일본어 시범이 반장의 자랑거리(혹은 원숭이 곡예)로서 식상해지고, 그 무렵부터 반장은 선생 몰래 나를 ‘쪽바리’라 부르며 괴롭혔다. 아이들도 뻔히 보고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 해도 반장은 어엿한 권력자였던 셈이다. 단순히 전학생이 참아내야 하는 텃세인가 해서 참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어느 날 작은 뇌가 터져버릴 듯해서 수업 도중 책상을 뒤집어엎으며 반항해버렸다. 담임을 포함해 모두 순간 굳었다. 상황 판단을 그제야 한 담임에 의해 다음날 내 자리는 바뀌었다. 물론 반장은 문책당하지 않았고 그날의 에피소드는 묻혀버리게 되었다. 나도 굳이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나쁠 때도 있는 법이니까.
다만 어린 마음에, 아 한국에서 튀는 것은 죄악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89학번의 대학 새내기로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인생만 피곤해지니까. 부르주아인 네가 이 세상의 모순에 대해 뭘 알겠니, 라고 과선배들이 쑤셔도, 반쯤은 그들의 이야기가 도저히 이해가 안 돼도, 그냥 묵묵히 최루탄 맞기를 선택했다. 일본 학교를 다니면서도 ‘조센징’ 소리 안 듣다가 모국에 돌아와 ‘쪽바리’ 소리 들었던 트라우마가 있다면 더 이상은 튀지 않고 싶은 법이다.
정말로 ‘튄다’는 건 과묵하고 슬픈 것
세월은 참으로 많이 변해서 요새 사람들은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다. 매스컴과 인터넷을 보면 돌출된 행동과 노출 혹은 튀는 외모로 ‘시선’을 즐기는 것 같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당찬 자기표현’이라고 붙여지는 그런 것들은 가변적으로 튀는 것으로 일종의 일상 탈출이나 축제일 뿐이다. 무리 지어 똑같이 튀면 더 안심도 되고 원할 때는 얼마든지 ‘튀지 않음’ 상태로 도망갈 수 있는 편리한 오락이다. ‘과감히’ 튀어보겠다 함은 실상 본질적으로 과감할 수 없다. 정말로 튄다는 것은 그 여중생처럼 과묵하고 슬프고 폭력적인 것이다.
불변인 기준들- 피부색과 신체적 결함, 혹은 가치관이나 소신- 이 본의 아니게 튀어버리는 사람들에게 ‘다름’은 평생 짊어져야 할 숙제다. 최소한 남들이 그것을 지적하며 거북함을 표현할 때는 대체 자신들의 어떤 점이 그들을 속 깊이 불편하게 했는지 정확히 알기를 원할 것이다. 상처를 받아봤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군가를 또 상처 입히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주로 “넌 그냥 달라” 그 한마디뿐이다. 가끔 편리하게 애국심이나 국민 정서로 입막음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설명을 친절히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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