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경선
요새는 중산층 가정 중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조기유학을 보낸다고 하더만 여행차 날아온 캐나다 밴쿠버 시내에서 숱한 한국인 청소년들을 지나치며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친구에 따르면 입국심사장에서 미성년자만 가려내면 한국인들이 우루루 줄을 선다는 농담도 돈단다.
이를 뒷받침하듯 조기유학생들은 매년 10% 이상 꾸준히 증가 추세요, 이젠 한국 학생이 서식하지 않는 곳을 북미 대륙 학군에서 찾기 꽤나 힘들 것이다.
밴쿠버에서 만난 마이너리티 애어른들
유학생들의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끼리끼리 어울려다니는 현상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한국인 아이들끼리 떼지어 활보하고 다니더라. 이에 조기유학 회의론이 자주 거론된다. 영어 실력은 제자리걸음이고 원래 하던 공부마저 노느라 소홀해진다고. 힘들게 벌어 자식새끼 입 트이게 만들어놓겠다고 보낸 부모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한국 학생들이 많이 없는 곳으로 선별해서 보내기도 하고, 원어민들과 섞이라고 아이를 닦달해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같은 한국인 친구들과 지내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본능이 아닐까 싶다. 속 편하게 한국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바람에 현지 원어민을 못 사귀는 게 아니라, 그들이 놀아주지 않기에 선택의 여지는 ‘코리안 커뮤니티’밖에 없다. 낯선 환경에서 서툰 언어로 공부하는 것보다 현지의 중·고교생과 친해지는 일이 훨씬 어려울 것이다. 흔히들 문화적 충격과 정서적 차이를 이유로 거론하지만 그것은 동등한 입장일 때 가능한 얘기다. 사춘기 특유의 예민함과 잔인함이 발동될 때, 이곳에서 한국 유학생들은 엄연한 마이너리티로 생활한다. 현지의 중·고교생들에게 아시아 문화와 코리안 친구들에 대한 우호적인 호기심이나 포용과 공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대학생쯤이나 되면 그나마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태를 의식하며 상대적 문화 차이에 관심을 가져줄지 모르겠다.
무한의 가능성을 품고 비상해야 할 시기에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부조리한 장벽’은 그들의 기를 죽이기 충분하다. 물론 아픔이 있는 만큼 인간은 성숙해지는 법이지만 대다수의 자식들은 부모 생각만큼 잘나지 못해 상처를 승화시켜 성장하기보다는 이를 끌어안고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간다. 물론 개중에는 안간힘을 써서 ‘백인 주류사회’에 끼어드는 독종들도 있을 터, 다만 아쉬운 사람이 늘 그래야 했듯이, 그 대가로 예전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탈바꿈해야만 한다. 주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바나나’가 되어야 한다. 대신 영어 실력은 늘겠지만.
드넓은 땅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유학원 팸플릿의 인상 좋은 존, 매리 학생들과 하하호호 영어를 완전 정복해주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유학생 그룹에 남든, 현지 백인들과 어울리든 간에 ‘애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부모가 유학파랬자 대부분 대학을 다녔을 터이니 자식들이 겪을 그 분위기를 이해하긴 힘들다. 백인사회의 중·고등학교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틴에이저들의 정글이다. 인종차별 때문에 현지 적응에 실패? 에이, 그래도 영어 하나만 건져도 본전이라고? 최소한 한국에서 학교 다니는 것보단 천국 아니니, 라고 말씀하시면 자식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배부른 고민인가 보다, 라며 학교 생활에 대해 부모가 궁금해해도 “말해도 모를 거야”라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밖엔 없다.
아이들의 마음고생도 헤아리길
조금 있으면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유학생들은 고국의 품에 귀국할 것이다. 행여 그간 배운 영어 잊어버릴까 집에서도 자식에게 영어를 요구하는 못 말리는 열성 엄마들도 있다. 하지만, ‘영어 하나 건졌냐’로 조기유학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 영어에 강박적으로 쏟는 에너지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인생의 쓴맛을 알며 어른으로 성장할 아이들의 마음고생을 헤아리는 데 쓰면 좋겠다. 지금 이 원고를 마무리하려는데, 한 여자 선배가 인터넷 메신저로 말을 건다. “너 지금 캐나다 가 있다며? 우리 애가 내년에 중학생 되는데 거기 보낼까 생각 중이거든. 지내기 괜찮을지 좀 알아봐봐.” 그 코흘리개가 벌써 중학생이 되나. 좋은 시절 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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