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경선 칼럼리스트
서점이나 지하철의 잡지 판매대를 지나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잡지 부록을 살폈던 경험이 있는가? 하도 형형색색의 부록들을 잡지에 테이프로 둘둘 감아 전시하고 있으니 기사 내용이 뭔지 파악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젊은 여성들은 유명 브랜드 화장품 부록 정도면 충분히 현혹될 법하다.
부록, 필요악이자 애증의 대상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 부록들을 만들며 밥벌이를 했다. 한 라이선스 잡지사의 마케팅을 담당했던 내게 부록이란 필요악이자 애증의 대상이었다. 부록 한번 붙이려면 억 소리가 났지만, 부록을 안 붙이면 판매 경쟁에서 맥없이 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고 경쟁사들끼리 부록 붙이지 말자고 소프트 담합을 시도해봐도 배신자는 꼭 나타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당장의 판매 수치를 맞추기 위해 부록 발주를 해야만 했다. ‘일단 어쨌거나’ 팔려야 독자들이 잡지를 접해줄 수 있다는 논리 때문에 장기적으로 브랜드 선호도를 높이기 위한 다른 마케팅 전술들은 2순위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부록 자체에 죄는 없었다. 엄연한 판촉도구니깐. 다만 활용 방식에 따라 약이 되거나 독이 되기도 할 뿐이다.
그리고 과한 욕심은 늘 독이 되었다. 더 좋은 부록을 더 자주 붙이면 잡지는 분명히 더 잘 팔렸다. 너도나도 부록 공세에 열을 올리고 누가 어떤 부록으로 대박을 터트렸는지가 업계의 화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독자의 ‘보는 눈’만 엉뚱하게 높이는 꼴이 되었다. 기사 내용에 대한 코멘트 대신 왜 이렇게 우중충한 색상의 립스틱을 부록으로 골랐냐, 이왕이면 다음에는 모 브랜드 립스틱으로 마련하라는 주문까지 밀려왔다. 부록만 가져가고 무거워서 귀찮다고 잡지책은 서점 화장실에 버리고 가는 이들도 갈수록 늘었다. 광범위한 소비자조사 결과도 잡지 구매 요인으로서 부록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씁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내성이 강해진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해 더더욱 부록에 열을 올려야만 했다. 악순환의 고리를 알면서도 원점으로 돌려놓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비(非)패션지’들이 일제히 DVD 등으로 현란한 부록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오 마이 갓, 정말 뜯어말리고 싶었다.
본사 출장에 갔더니만 이 특수한 부록 의존성과 부록 과다경쟁이 매우 한국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잡지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 유럽의 잡지 출판인들은 한국 잡지들의 부록을 보면 아주 제대로 놀란다. 오우, 너무 훌륭하다는 것이다. 반면 그들의 잡지 부록은 어디까지나 이름 그대로 ‘부록’일 뿐이고 늘 주인공은 ‘잡지 그 자체’임을 확실히 인식시키려는 듯, 적당히 겸손할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었다.
반면, 우리는 어느새 이놈의 ‘플러스 알파’에 너무 중독돼 있었다. 우리 강아지도 한때 예쁘다고 사료 대신 고기 통조림을 너무 줬더니, 다시 사료를 먹게 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이젠 잡지도 부록이 안 붙어 있는 것을 사면 손해 보는 느낌이다. ‘덤’이 없으면 모든 게 시시해진 것이다. 이게 비단 잡지만의 문제이겠는가. 자녀들은 학교 공부 외에도 잡다한 사교육을 받아야 기본을 하는 것처럼 안심한다. 연예인들은 쉴 새 없이 유치한 개인기를 개발해줘야 한다. 결혼식에 가면 자꾸 이상한 이벤트만 늘어나서 손바닥만 아프다. 휴대전화 회사들은 매번 작은 변화 하나로 마치 내일이 없듯이 치열하게 광고전을 펼친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친절함을 너무 강매한다. 그리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로 굳이 손님들의 대화를 끊을 것까진 없지 않는가. “이건 손님들께만 특별히 서비스로 더 해드리는 거에요”라는 말도 이젠 감동이 없다.
슬프도록 냉소적인 마케팅 예찬론
“역시 마케팅이 중요하지(어쩔 수 없어)”라는 마케팅 예찬론은 현실적으로는 타당할지 모르겠지만 슬프도록 냉소적이다. 우리는 약이 천천히 독으로 변하는 현실을 훤히 알면서도 서로 눈치 보며 멈추지를 못한다. 다들 지기 싫어하고 성격들도 오죽 급하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간도 쓸개도 다 빼주긴 또 억울하니까 소심하게시리 단가를 티 안 나게 조정하며 머리를 굴린다. 알고 보면 세상에 공짜란 없다. 그렇다면 ‘알고 보면 조건 있는 공짜’는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일까? 덤은 필요 없으니까 제발 기본에만 충실해다오. 우리 모두 기본 기량만 가지고도 너끈히 심플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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