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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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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없어지세요

등록 2006-05-18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주민등록증 좀 보여줄래요?”
그렇게 요구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들통날까봐 겁났습니다. 꽁꽁 숨기고픈 나이의 비밀. 특히 술집에서 ‘자격 미달’로 쫓겨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중딩이나 고딩 때의 기억이 아닙니다. 대학생 때의 일입니다.
저는 만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2월에 출생했기에, 3월 이후 태어난 친구들보다 한 해 먼저 들어갔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니 만 18살. 재수를 한 친구들은 저보다 두 살 위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땐 남들보다 어리다는 게 무작정 부끄럽고 싫었습니다. ‘미성년자 출입금지 업소’를 드나들면 걸리는 나이였기에 더 그랬나 봅니다.

동기나 후배들에게 ‘진실’을 숨기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학생증의 생년 기록을 변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흘렀습니다. 만 19살이자 대학 2학년. 그럼에도 성인 대접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투표를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결국 3학년이 되어서야 그 권리가 생겼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두 가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2008년부터 초등학교 입학 기준일이 1월1일로 변경됩니다. 1, 2월에 태어나도 만 6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할 수 없게 됩니다. 한 살 어린 아이들의 왕따 피해를 걱정한 조치라고 합니다. 둘째, 선거권 연령이 올해 지방선거부터 만 19살로 낮춰졌습니다. 세계적 추세를 따른 결과입니다. 반세기 만의 혁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너무 일찍 학교로 진출해 겪는 가슴앓이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서도 ‘애 취급’당하는 현실은 조금 개선될 듯합니다.

물론 여전히 배가 고픕니다. 세계 167개국 중 만 18살부터 선거권을 주는 나라가 무려 143개국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처럼 만 20살이 기준점이던 나라는 7개국뿐이었습니다(2004년 기준). 3·1 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은 당시 만 17살이었습니다. 4·19 데모의 김주열 역시 같았습니다. 심지어 용감하게 공산당에 맞서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이승복은 겨우 만 9살이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근현대사에서 미성년자들의 ‘정치적 역할’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최대한도로 투표 연령을 내려잡는 게 마땅해 보입니다. 참고로 북한은 17살부터입니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에 가세한다고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건 옛말이 되고 “요즘 애들 보수꼴통”이라는 농담이 유행할 지경이랍니다. 20대들의 보수화 징후를 증명하는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10대들이 고분고분하고 안정을 추구하고 시대의 주류를 좇기만 하는 세상. 재미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세상의 권위에 대해 버르장머리 없는 19살, 늙은이들이 쌓은 기성의 질서에 당돌하게 대드는 19살을 그려봅니다. 19살 여러분, 개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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