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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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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없습니까?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재바르게 스쳐가던 풍경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승용차는 기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목을 뽑아보니 앞뒤로 기다랗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이 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도시는 이런 식으로 타지에 다녀온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습관이 있다. ‘서울이구나.’ 멀리 노란색 톨게이트가 이 장사진을 거만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친들 ‘뿌리 뽑힌’ 삶

4년 전 어느 봄날, 나는 아버지를 고향 선산에 묻고 돌아오고 있었다. 문득, 모든 게 지겨워졌다. 2년의 전세계약이 끝나면 다시 떠나야 하는 세입자의 비애를, 성냥갑 같은 임시 거처에 살면서 겨우 정붙인 것들과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지겨웠다. 만나서 악수하고, 안부를 묻고, 헤어질 때는 1년 뒤가 될지 2년 뒤가 될지도 모를 다음 만남을 그래도 억지로라도 기약해야 마음 놓이는 허망한 도시의 인간관계에 이미 나는 진이 빠져 있었다. 배후의 농촌을 착취하는 도시, 자원을 한정 없이 갖다 쓰기만 하는 도시, 인간의 온기를 빼앗아 연명하는 도시, 말하자면 도시는 생태계의 거대한 ‘종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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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 누구들처럼 용기가 없었고, 달리 갈 데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이 도시에 정을 붙이고 싶었다. 앞뒤 버스 사이에 끼여 압사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면서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텃밭을 가꾸었다. 변혁의 열망으로 치장했으나 다만 소박한 우정의 근거지를 위해 사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나는 병든 아버지 곁에서 30년간의 불효를 씻어내지도 못했고, 마지막 순간조차 함께하지 못했고, 결국 고향으로 출발하는 차 안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말았다. 유별스런 효자도 아니었던 나로선 스스로도 채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도시에 만정이 떨어져버렸다. 아무리 발버둥쳐본들 나는 그저 ‘뿌리 뽑힌 삶’이었다.

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던 그때, 톨게이트 입구의 지체를 다시 만났던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나에게도 고향이 있지 않은가. 머나먼 곳 강원도, 충청도 혹은 서울 근교의 강화 어느 곳을 후보지로 올려놓고 주판알을 튕기는 것으로 귀농의 대리만족을 삼은 지 몇 년 되던 때였다. 그런데 그 어느 곳도 아닌, 내가 나서 19년간 자랐던 곳, 짧은 스포츠머리의 금욕과 숨 막히는 교육열로 어린 영혼을 내리누르던 곳, 그래서 언제라도 떠나고 싶었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 우리나라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극우 정치인을 내리 세 번 대표로 뽑아 여의도로 올려보낸 경상도 오른편의 소도시가 ‘고향’이란 이름으로 나에게 육박해왔던 것이다.

귀향 4년째, 기쁜 열망이 있다네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모든 게 분명해졌다. 아버지의 육신이 담긴 관에 흙이 뿌려질 때,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내 아들은 육신의 연쇄 속에 있다는 것을 소스라치듯 느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어느 곳이든 뿌리내려야 했고, 그렇다, 내게도 고향이 있었다. 자동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도 어디든 충분히 다닐 수 있다는 것, 밉건 곱건 한정된 실명의 공간에서 일생토록 부대낄 구체적인 이웃을 가진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그렇게 학교를 옮기고 이제 귀향 4년째로 접어들었다. 고향은 별로 변하지 않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란 아이들을 가르쳐 도시로 떠나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쁜 열망이 있다. 땅과 고향을 지키는 일, 이 아이들 중 누구라도 되돌아와 살 만한 곳으로 내 고향을 가꾸는 일, 전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실천하는 일, 내가 떠나더라도 다음 세대에 넘겨줄 구체적이고 한정된 책임이 나에게는 있다.

우리에게 고향이 있는가. 육신의 탯줄을 도회에 묻었을지언정, 우리가 뿌리내릴 정신의 고향은 있는가. 가치로운 것이라면 뿌리부터 뽑고 보는 것이 일상이 된 이 기막힌 시대에, 몸 둘 곳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이 가여운 시대에, 마음의 정처를 찾아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나는 거듭 묻는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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