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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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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누나 | 권보드래

등록 2006-03-10 00:00 수정 2020-05-02 04:24

유관순. 3월1일이면 절로 그 이름이 떠오른다. ‘누나’라는 명사 때문에 부를 때마다 모종의 분열에 빠져들게 하던 노래의 토막토막도.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며….” 사실 내가 아는 건 노래 토막이 전해주는 사실, 딱 그것뿐이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 학교가 휴교된 뒤에는 고향 천안에 내려가 만세 시위를 주동하다 결국 체포, 재판 과정과 감옥 생활을 통해 뜨거운 저항의 자세를 잃지 않아 고문에 시달렸으며 결국 고문 때문에 사망. 어떻게 ‘유관순’이라는 이름이 3·1운동의 상징이 됐는지 궁금하지만, 마침 도서관 휴관 중이라, 며칠 더 기다려보아야겠다. 사전이며 개론서에 더구나 인터넷을 뒤적여 얻은 자료는 볼수록 아리송해질 뿐이니.

언제까지 팔아먹을 텐가

유관순 하면 떠오르는 영상은 먼저 처참한 고문 현장이다. 공중에 매달려 고개가 꺾이고 머리가 흐트러져 있는 모습, 고춧가루며 물고문에 기진해 있는 모습. 어렸을 적 본 위인전 삽화쯤 될 장면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몇 종의 유관순 사진 가운데 가장 ‘비여성적인’ 사진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유관순의 이미지가 고문을 통해 주조됐다는 사실과 연관돼 있지 않을까.

어디 유관순만 그러랴. 일제시대와 관련된 여성 이미지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애국부인회 사건―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김마리아. 강제위안부― 사냥당하듯 잡혀가 성폭행, 성폭행, 성폭행 속에서 살고 몇십 년 동안 망가진 몸과 마음에 부대꼈다는 할머니. 분노는 당연하다. 어떤 갈등의 여지도 없다. 고작 열일곱 살 여학생을 그렇게 죽어가게 만들다니. 이러다 보면, 유관순의 시신이 고문 때문에 여섯 토막 나 있었다는 증언을 믿고 싶게까지 된다.

아, 그러나 종종, 언제까지? 어디까지? 이런 의문이 솟구쳐 오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희생자로 살 것인가? ‘순결한 누이’들을 내세워, 어디까지 무고한 피해자인 척할 것인가? 2006년 지금, 영광의 대한민국을 살면서? 과거는 언제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가? 몇몇이 예언하는 대로 민족국가의 시대가 사라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랏돈도 많이 받아먹은 처지라, 나는 여전히 ‘민족’에 끄달린다. 그러나, 다만, 좀더 ‘성숙한 민족’에 끄달리고 싶다. ‘순결한 누이’들을 알리바이 삼아 들이미는 일은 정말이지 그만 보았으면 싶다.

유관순을 기억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강제위안부 진상 규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의 얼굴이 될 수는 없다. 안중근만 떠올려도 생각은 훨씬 복잡해지지 않는가? 살인과 애국 사이의 함수 관계는? 이토 히로부미 살해의 실질적 효과는? 믿거나 말거나,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전 “어리석은 놈” 하고 중얼거렸다는 풍문까지 곁들이면 다소의 갈팡질팡은 필수적이다. 의열단은 어떤가? 항일 무장투쟁 세력은 어떤가? 안중근이며 의열단이며 항일 무장투쟁이 상기시키는 ‘긍지’는, ‘순결한 누이’들을 떠올릴 때의 정서적 반응과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긍지’에서 출발하면 성찰과 탐색이 가능하지만, ‘순결한 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의식 앞에서는 어떤 이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강제징용과 강제종군 대신 강제위안부를 떠올리는 데 더 익숙한가?

단죄가 맹목이 돼서는 안 된다

숱한 물음표를 찍는다. 물음표, 물음표. 확실히 이건 좀 비겁한 물음표이지만, 그래도 제 2차 세계대전 뒤 처형당한 23인의 한국인 전범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질문까지 마저 던져두고 싶다. 그들은 얼마나 죄인인가? 그들과 우리는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 개인이든 민족이든 인류든, 남을 단죄하고 응징해야만 할 때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맹목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몇십 년 전 ‘순결한 누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바로 지금 누군가의 ‘순결한 누이’를 짓밟고 있는 자기 모습에 눈 어두워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순결한 희생자라고 자처할 수 없는 시절, 이젠 정말이지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 다만 물음표만 무수히 늘어놓을 뿐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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