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국문학과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시작이다∼.” 지난해에 유행한 모 카드회사 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은 절로 흥겨워지곤 했다. 쿵짝짝 쿵짝짝. 배경이 고급 나이트클럽이건 해외 리조트건 전세 낸 1등석이건 무슨 대수랴. 양팔에 여자를 끼건 남자들 사이에 파묻혀 있건 또 무슨 대수랴. 여러 해 전 <원초적 본능>을 보고 나서 “그러니까 누가 범인이란 거니?” 끝끝내 궁금해하셨던 어머니는 이 광고 앞에서도 “원, 별 미친 광고를 다 보겠다”며 고개를 돌리셨지만.
고통은 집세 같은 것?
웃으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흥얼흥얼. 물론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인생을 즐기라고 해서는 그야말로 ‘각’이 나오지 않을 것이며, 잘나가는 미혼 남녀 대신 늙수그레한 주인공을 내세워서는 영 ‘가오’가 서지 않겠지만. 남성 중심이고 젊은이 중심이지만, 무슨 대수랴. 들썩이며 그 광고를 보다 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빨간색 드레스를 걸치고 뭇 시선 속에서 멋지게 춤을 추는, 그런 식의 삶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드는 것이다. 빨간색 드레스가 아니라도 좋고 세련되게 엉덩이를 흔들지 못해도 좋지만, 그런 쾌락의 감정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면 웃음의 용법에 너무 인색했나 싶다. 웃음에서도 늘 리얼리즘이나 실용주의를 발견해내야 직성이 풀렸으니 말이다. 찌는 듯 더운 날 “다행히 추운 날씨는 아니잖아?” 하며 웃어댄다는 낙관이나, 주름진 얼굴에 천천히 피어오르는 미소. 무언가를 견디게 해주는 힘이거나 고난을 넘어선 뒤에 찾아오는 평온. 웃는 걸 좋아하고 정말 잘 웃는 편이지만, 긴장 속에서 찾아오는 한순간 이완이라야 웃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늘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내 답은 한결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 좋은 일만 하고 사냐? 야야, 다들 힘들게 살아. 누가 그랬잖아. 사는 데 고통은 집세 같은 거라고.”
그건 알리바이가 아니었을까? 국민소득 3만달러와 아프리카의 기아 구제를 함께 달성하려고 할 때 같은, 이해할 순 있으나 자가당착인 명제가 아니었을까? 많이 웃되 견디고 넘어서는 방식으로서 웃어라, 라니. 그냥 낄낄대며 웃는 걸 두려워하다니. 나이트클럽이며 해외 리조트는 가본 적도 없지만, 가봤댔자 내 머릿속의 ‘긴장!’ 명령어는 끝끝내 날 불편하게 했을 게 분명하다. 다른 데 가버리지도 못하면서 엉거주춤 서서 주변의 즐거움마저 망치기 십상이었겠지. 부끄럽게도, 그런 긴장이 세상에는 한 톨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옛적에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 양주(楊朱)가 그랬단다. 내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내 그러지 않겠노라, 라고. 누가 그렇게 주석을 달아주었다. 그건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위선 떨지 말라는 공격이었다고. 천하의 도학 선생들이여. 당신들, 세상을 걱정한다는 당신들이 병폐로다, 라는 풍자였다고. 천하를 이롭게 하겠다고 나대는 위선이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우리라. 네 정말 천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정직한가? 아니라면, 고작 머리카락 한 올이 문제될 때라고 함부로 나서지 말라. 저마다 위선 떨지 말고 제가 어떻게 해야 진정 즐거울지를 생각한다면 세상은 절로 평화로울 테니.
차라리 자아도취가 그립다
요즘은 차라리 몰입이나 자아도취가 그립다. 1930년대 말 어떤 소설가는 범죄에서라도 ‘야성의, 살아 있는 인간’을 발견하기를 갈망했는데, 일맥상통하는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에 미치고 패션에 미치고, 현미경 들여다보고 기계를 만지는 데 평생을 거는, 그런 솔직한 몰입이 그립다. 그 바깥이라면 “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하면서 머리를 긁는, 그런 순진한 무책임에 합류하고 싶다. 인생을 즐겨서 안 될 건 없지 않은가? 만약 내가 신문을 뒤적이는 게 오직 명분과 체면 때문이라면, 차라리 그릇에 맞게 내 눈앞의 세상을 다독이는 게 현명할 것을. 그러니 나여, 제발 오늘은 인생을 즐겨라! 세상과 만나더라도, 즐겁게, 내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만나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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