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국문학과
오추옥, 전용철, 홍덕표. 쟁쟁거리는 이름이 한 달째 자꾸 늘어나, 오랜만에 인터넷 신문이며 게시판을 뒤진다. 쌀 협상 비준안 국회 통과. 관세화 유예 기간 10년. 그러나 2014년 이전에도 매년 쌀 의무 수입량을 늘려야 하며, 올봄에는 시장에서 수입쌀을 보게 되리라고. 관세장벽을 쳐봤자 원가가 국내산 쌀의 4분의 1에 불과한 게 수입쌀이라, 전국 350만 농민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보편적 죽음’은 없다
10년 넘게 들어온 소식이다. 더더욱 목전의 당면사가 된 게 다를 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양보는 어쩔 수 없다느니, 목숨이나 매한가지인 쌀을 다른 상품과 똑같이 취급해선 안 된다느니,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저항해야 한다는 호소까지, 부딪히는 논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약한 기시감(旣視感)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40대 장년에 60대 노인까지 ‘쌀 협상 반대’를 외치다 목숨을 잃었는데, 신경세포가 이토록 둔감하다니. 시위 현장에서 분신을 시도한 사람만도 여럿이라는 소식도 들었던 터다. 죽음마저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면, 대체…?
인터넷 게시판에선 찬반 의견이 뒤엉켜 아우성이다. 한쪽에서 국가의 폭력을 비판하면, 다른 쪽에선 경찰은 얼마나 다쳤는지 아느냐고 받아친다. 한쪽에서 방패에 찍혀 피 흘리는 얼굴을 올리면, 한쪽에선 죽창에 실명하고 얼굴이 찢긴 전·의경의 모습을 들먹인다. 부상자 수를 비교해야 할 판이다. 농민 대 경찰. 서로 ‘알바’ 댓글꾼이라고 공격하며 으르렁대는 그 판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무거워진다. 죽음은 여전히 흔하다. 다만 그것이 좀처럼 보편적 문제가 되지 못할 뿐.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죽음의 날짜는 1991년 5월이다. 자고 나면 한 명씩 분신 소식이 들리던 무렵, 그때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차곡차곡 죽음의 무게가 얹힌 위에, 또 매일매일 얹히는 그 무게라니. 1970년의 전태일에서부터 1980년의 숱한 죽음을 거쳐 1990년대 초의 그때까지, 죽음은 곧 내 문제이기도 했다. 노동과 시위 현장에서뿐 아니라 바로 곁에서 생기는 이름 없는 죽음도 많았다. 고민 끝에 강물에, 지치고 지쳐 목을 매서. 아직도 나는, 정말 정직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벌써 10년이 넘었다. 기억은 어슴푸레해지고, 눈앞을 보는 시야는 점점 좁아진다. 요 10년간 기억나는 죽음이란 범죄나 대형 참사 속의 죽음이다. 지존파, 막가파,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또렷한 몇몇 희생자. 누구든 덮칠 수 있는 재앙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그런 사건 속의 죽음만이 기억난다. 노동과 시위의 현장이 사라졌을 리 없건마는. 저항과 투쟁의,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소식이 종종 전해졌건마는.
자기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전체의 해방을 추구하는 계급― 프롤레타리아. 이 오래된 명제가 아직 유효하다면, 우리는 지금 프롤레타리아의 실종을 목격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싸움이 절로 전체를 위한 싸움으로 고양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그런 사회적 동의가 좀처럼 형성되지 않는다. 노동자도 농민도 학생도 ‘나를 대신해’ 싸우는 듯 여겨지지 않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죽자고 뛰듯, 저 사람 역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뛰고 있는 듯 보인다. 저마다 자기 앞만 보고 달린다.
저항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저절로 보편계급이 될 수 없다. 오랫동안 ‘고향’ 노릇을 해온 농민이 나설 때마저 그렇다. 비 안 오면 가뭄 걱정하고 태풍 불면 풍수해 걱정하는 건 여전한 습관이련만, 그 ‘고향’이 나서도 한 번 붙인 눈가리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자고 달려도 언제 낙오할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팽팽한 지금, ‘남의 일’이라고 밀쳐둘 수 있는 한 무엇도 달음박질을 멈추게 하진 못한다. 이 각개약진이 덫이라는 걸 예감하면서도 먼저 다른 길을, 다른 걸음을 선도할 용기는 좀체 낼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길을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 저항은 어떻게 시작되는지가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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