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왜 태어났니~.”
어릴 적 친구 생일잔치 때 장난 삼아 부르던 노래입니다. 곱씹어보면 대단히 철학적인 노랫말이지요. 우리는 정말 왜 태어났을까요. 한 가스펠송 가사에 따르면, 사랑받기 위해서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종교적인 뜻이 숨어 있지만,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갑니다.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표현은 진보적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복종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주문을 달달 외우고 다녔던 시절에 비하면 말입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건 복종의 맹세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엄숙한 코미디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요. 세월과 함께 세상이 합리적인 쪽으로 변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유신시대 국민교육헌장의 망령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아주 ‘깨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이번호 표지이야기의 작은 단서를 제공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6월 한겨레신문사가 제2창간운동의 일환으로 연 체육대회에서였습니다. 한겨레신문사 사원 수백 명을 포함해 3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식전행사로 간단한 국민의례가 시작됐습니다. 사회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외쳤지요. 애국가가 장중하게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습관처럼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동시에 베이스톤의 남자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한겨레조차 이런 맹세문을 읊는다는 사실이 쇼킹했습니다. 닭살이 돋았습니다. 국가주의를 장려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겁니다. 용역을 맡은 이벤트 회사가, 대통령령으로 정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따랐을 뿐입니다.
주변에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정도의 예(禮)는 용인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대답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맹세문’의 구절을 생각할수록 모독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거의 ‘무뇌’ 수준의 맹목적 사랑이 아닙니까?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절대 몸과 마음을 바치지 말아야겠다는 반발심이 슬며시 솟구쳤습니다. 이 죽일 놈의 사랑, 아니 이 죽일 놈의 충성! 이건 가미카제 같은 ‘자살특공대’에나 필요한 의식이 아닐까요? 21세기에도 그걸 강요하는 대한민국이 좀 징그럽습니다.
2006년에는 국기에 대한 충성의식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것도 같습니다. 남종영 기자의 ‘특종’을 보며 그런 예감을 합니다. 그는 광양, 순천, 김해, 대전 등 전국을 누비며 불꽃 같은 취재를 했습니다. 결국 정부도 모르던 ‘국기에 대한 맹세’ 문안의 원작성자를 찾아냈습니다. 85살 할아버지가 된, 전 충남도 장학사 유종선씨는 맹세문 작성 과정의 비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현 맹세문이 전체주의적”이라고 고백합니다. 34년전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피눈물을 흘렸던 이들도 만났습니다.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치명적입니다. 표지이야기를 읽으면 죄 없는 태극기가 무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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