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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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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한 자들의 슬픔

등록 2005-10-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이상한 아저씨가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다니던 작은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서른 안팎의 나이였는데, 특별한 직업이 없었습니다. 그저 동네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게 일과였습니다. 이웃들과는 커뮤니케이션이 안 됐고, 엉뚱한 혼잣말만 했습니다. 날품팔이를 하던 늙은 홀어머니는 매일 새벽예배에 나와 아들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일요일엔 아들을 꼭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예배 도중에 일어나 이유 없이 행패를 부렸습니다. 결국 멱살잡이 끝에 강제로 끌려나가야 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제 또래 아이들은 그를 ‘돌아버린 아저씨’라 부르며 무서워했습니다. 20년도 넘은 일이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몇해 전부터 그의 얼굴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또 다른 기억을 살려낸 겁니다. “아, 맞아. 그 아저씨가 월남을 다녀왔었지….”
저는 1999년부터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만났습니다. 한두명이 아니라 수십명을 인터뷰했습니다. <한겨레21>이 베트남전 캠페인을 시작하고 나서입니다. 그들은 모두 멀쩡했습니다. 더구나 용맹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남자답게 싸웠고, 위기를 넘겨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악몽’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베트콩의 머리도 잘라봤다는 분대장 출신의 참전 군인은 밤마다 머리만 남은 적의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한다고 했습니다. 수색작전 때마다 전과를 올렸다는 어떤 고엽제 환자는 술에 취해 사무실로 자주 전화를 걸었습니다. 억울한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다가, 전장에서의 죄책감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때로 너무나 수다스러웠고, 때로 너무나 우울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사람을 죽여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알고 보면 합법적으로 살인을 해본 경험자들이 적잖습니다. 베트남전 때 사병이나 하사관으로 참여한 이들은 지금 50대입니다. 장교 계급장을 달고 건너간 이들 중 상당수는 60대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70, 80대의 한국전쟁 참전자들도 있습니다. 1965~73년의 베트남 참전 기간 중 연인원 32만명의 한국군이 5만여명을 사살했습니다. 아군 5천여명도 사살당했습니다. 사람을 죽여본 사람, 사람이 죽는 현장에 서본 사람은 여전히 많습니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그 끔찍한 스트레스는 수십년이 흘러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팔다리가 잘리지 않아도, 그 못지 않게 마음을 다쳐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상이군인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지난 10월7일, 서울의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세미나실에서는 ‘베트남전쟁과 한국사회- 정신의학자가 본 전쟁의 상처’라는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사진). 베트남전 종전 30년 만에 본격적으로 참전 군인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을 보듬은 첫걸음입니다. 이 행사를 주최한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의 뿌리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입니다. 바로 <한겨레21>의 베트남 캠페인을 계기로 1999년에 만들어진 평화단체입니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는 이 사업을 광범위한 조사·치료 프로그램으로 끌고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고통받는 영혼이 위로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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