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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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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만만 | 박민규

등록 2005-09-15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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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뜻하는 라틴어 에콜(ecole)의 어원은 여유였다고 한다. 척, 나는 사전을 펼친다. 라틴어 사전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잼 바른 빵을 씹으며 뭐 여유로운 마음으로 국어사전을 펼쳐든다. 여유(餘裕)[명사] 정신적·경제적·물질적·시간적으로 넉넉하여 남음이 있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 땅에는 학교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없다라고, 나는 되씹듯이 생각한다. 울컥, 목이 멘다.

‘학교’란 이름의, 저것은 무엇인가

학교는 대단한 것이다. 매머드 사냥을 하고, 질병과 맹수의 습격에 시달리고, 겨우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던 인간들이 학교를 만든 것은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정말 ‘여유’였다. 사냥을 하지 않아도,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인간들이 비로소 모여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유가 없었다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 세계와, 그 이유와, 옳고 그름 따위에 대해 사고하고 사유했을 것인가. 울컥, 나는 다시 목이 멘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인간 앞에선 이 세계와, 그 이유와, 옳고 그름 따위는 정말이지 그 따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학교는 그래서 중요하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우리와는 달리 이 세계와, 그 이유와, 옳고 그름을 고민할 수 있는 ‘여유로운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그래서, 언제나 파쇼와 독재정부와 정치세력의 감시대상이었다. 그들은 늘 학교를 탄압하고 봉쇄해왔다. 그들이 던지는 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여유가 - 이 세계와, 그 이유와,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무서웠던 까닭이다. 현실이 급박할수록, 그래서 학교는 그 자체로 이 세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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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것은 무엇일까. 저 학교란 것들은, 그리하여 내가, 당신이, 우리의 자식들이 다니고 다녀야 했던 저것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여유를 포기해야 하는, 아니 우리의 여유를 박탈해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여유를 자진 반납케 하는, 저것은 무엇일까. 먹고살기에 급급한 우리보다 더 급급한, 저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말하자면 저 학교란 곳에 그래도 아이를 보내야 하는 부모로서, 먹고살기에 급급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나는 다시 목이 멘다. 이제 여유를 가진 인간이 없다는 이 두려움, 이제 학교가 사라졌다는 이 적막함, 이제 우리는 모두 노예라는 이 자괴감.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반납한 여유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우리에게 사냥과 농사를 전담시킨 저들은 누구인가, 모르겠다 급급해서, 모르겠다 난 바빠서, 모르겠다 배 고파서.

교육이란, 이 급급한 세상에서 한때나마 한 떼의 아이들에게 무한한 여유를 부과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유롭게, 그들로 하여금 이 세계와, 그 이유와,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험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급급한 세상에서 노예이지 않게끔, 않아도 되게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도 속은 주제에, 강요하지 마라

오늘 당신의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마라. 오늘 당신의 아이에게 새 학원을 등록하라 다그치지 마라. 제발 부탁인데, 오늘 당신의 아이에게 좋은 대학을 가야만 한다고 다그치지 마라. 아이의 여유를 박탈해놓고, 아이의 미래를 책망하지 마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인간이 노예로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무엇보다 속은 주제에, 아이에게 설교하지 마라. 묻겠는데 그래서 좋은 학교를 나온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잡았다고 하는 당신은, 그래서 행복한가? 급급한 주제에, 속은 주제에,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강요하지 마라. 말하건대 여유만만한 아이를 만들어주자. 이제라도, 저 보름달처럼 여유만만한 아이들이 많아져야 나 너 우리 대한민국이 자신만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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