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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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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 박민규

등록 2005-09-02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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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사를 이끌어온 에너지는 순박(淳朴)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란 명제만으로 너도 나도 일어나 일터를 향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10억달러 수출의 탑, 또 고향의 부모를 떠올리며 야근을 마다않던 일꾼들이 공장마다 가득했다. 이 한 몸 불살라 세상을 바꾸려 한 이도 있었다. 분신과 투신, 궐기와 투척이 신문의 전면을 장식한 적도 많았다. 그날이 오면, 우리가 함께하리란 신념으로 끝끝내 저 강을 건너간 이들도 많았다. 열광하고 감격했으며, 그런가 하면 금강산댐 정도의 아이디어에도 순순히 속아 넘어가고는 했다. 비일비재, 말하자면 삥을 뜯기고도 잘 몰랐다. 배워야지, 그래서 소를 팔아 자식을 교육했다, 서울서 온 손님에게 땅을 팔았다. 아들아,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거라. 우리 선생님이 집권하면 나라가 설 줄 알았던 사람들, 눈앞에서 쿠데타나 3당 통합이 벌어져도 끝끝내 참고 견디던 사람들, 친구의 사업에 보증을 서고, 평생 내 직장 내 일터에 뼈를 묻겠다던 사람들이 이 땅에는 즐비했었다. 어쨌거나

저는 속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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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을 이끄는 에너지는 영악(獰惡)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새벽종이 울린다는 명제 따위에 일을 나서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밀어줄 테니 당신이 한번 나서보시지, 이 한 몸 잘살면 그만이고- 분신과 투신, 궐기와 투척은 내신과 변신, 발기와 투기로 변모한 지 오래다. 그날이 오는 건 그날이 오는 거고, 글쎄 그날이 와도 우리가 과연 함께할 수 있을까나? 적잖이 부담스럽고, 금강산댐, 같은 소릴 정부가 뱉었다간 그길로 누리꾼들의 폭격이 댐이 무너질 때까지 퍼부어질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한국인들은 속지 않는다. 잘, 속지 않고 잘, 빠져들지 않는다. 집권한 우리 선생님들로부터 결국 뒤통수를 맞은 까닭도 있겠지만, 정치인들이 그토록 비벼대던 지역감정의 언덕도 이미 토사가 절반쯤은 무너졌다. 평생직장은 면접 때나 하는 소리고, 성형했네, 합성이네, 결국 어떤 것도 보증받지 못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보증이라니, 이 친구야.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지? 보증이 가능한 세상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불이익을 겪는 것도, 이익을 누리는 것도 결국은 나, 나라는 개인의 문제란 사실. 말 그대로

세상의 불꽃은 점점 작아졌다. 분신의 불길에서 화염병의 불꽃으로, 다시 촛불시위의 흔들리는 촛불로 불꽃은 점점 작아졌다. 이제 한국인은 격하지 않다. 감격하지 않고, 울컥하지 않는다. 아니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울컥할수록, 나만 손해란 사실을. 그러고 보니 격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버렸다. 감동은 영화 속에 감격은 스포츠에- 써놓고 보니 마치 하나의 표어 같지만, 그래서 이 사실이 실은 우리의 슬로건임을 나는 순순히 시인한다, 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동은, 또 개인과 사회, 개인과 세계 사이의 감격은 이제 사라졌다. 에이, 합성이잖아요. 실로 이익이 없음을, 영악한 머리들은 이미 몸으로 또 세포로 알아버렸다. 저는 속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뜻밖에도.

우리는 영리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 영악이 나는 마음에 든다. 속지 않고, 분통 터질 일 없는 이 영악이, 영악한 지금의 한국인이 나는 마음에 든다. 이것도 일종의 국력이 아닐까, 대다수의 국민이 이토록 영악한 나라도 드물다면 드문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더는 속지 않고 당하지 않는다는 그 쾌감이, 그래서 순박의 터널을 지나온 나 같은 인간에겐 강렬하게 와 닿는 것이다. 그래서 묻겠는데, 어쩌면 우리는 순박한 시대의 인간들보다 더 다루기 쉬운 집단은 아닐까, 요는 우리 모두가 개인이란 사실, 또 우리의 본능이 영악하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그래서 우리는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영악을 뛰어넘어 영리로, 어쩌면 그것은 다시금 너와 우리, 나아가 세계를 생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 촛불을, 그래서 결코 꺼뜨리지는 말자. 성형도 합성도 할 수 없는 변치 않는 사실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이익이란 진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는 영리해져야 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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