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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났습니까? | 박민규

등록 2005-08-19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대부분 서너 군데의 학원을 다닌다. 서너살부터, 그것이 보편적인 한국인의 출발이다. 길고 긴 성장선(線)이, 조기교육과 영재교육과 전인교육이란 이름의 광활한 배추밭이 어린 애벌레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배춧잎을 먹기 위해선 배춧잎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배춧잎만큼의, 쩐(錢)이 필요하다는 얘기 되겠다. 쩐을 마련하는 건 부모의 몫이다. 열심히, 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들은 일한다, 돈을 번다, 축적한다. 간혹 선생들은 촌지를 챙기고, 간혹 학원 원장들은 빌딩을 챙기고(사회의 안녕을 위해 간혹이라 써주마), 간혹 부모들은 자녀의 좋은 결과를 챙기지만(이건 가혹할 정도의 간혹이 아닌가), 모두 정신의 성장과는 무관한 일들이다. 공부해라. 내내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앉혀놓고 선생들은 얘기한다. 초경을 앓고 몽정을 하면서도, 그렇게 아이들은 책상에 붙들린다. 공부라는 - 보이지 않는 끈끈한, 질기고 질긴 누에고치 속에 빼곡히 아이들은 틀어박힌다, 자리 잡는다, 세팅 완료.

아, 아직도 부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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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아이들은 자란다. 십수년간 참고서와 문제집만 디립다 파헤치다가, 잘하면 대학이라도 가고, 말하자면 대학이나 들어가고, 계속 부모가 주는 용돈으로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하며, 최신형 MP3카메라폰을 구입하고(아아, 자네가 알바를 한다는 건 알고 있어), 어엿이 한자리를 차지했건 못했건 아이들은 자란다, 큰다, 컸으므로 어느덧 결혼 적령기란 것에 이른다. 조건을 갖췄습니까? 조건을, 갖췄습니다. 그 조건엔 대부분 부모들이 관련되어 있다. 여자쪽 부모에게 짐지워진 수천의 혼수가, 또 남자쪽 부모가 마련해야 할 집이, 집이 아니더라도 전세가(뭐야, 아버지 쪽팔려요)! 1280x1024 픽셀의 바탕화면으로 깔려 있다. 그건 뭐, 말 그대로 밑그림이다. 글쎄요, 인생의 새 출발이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요(뭐야, 아직 출발 안 한 거냐)? 어쨌거나 그래서 그 집을 남자는 나선다. 잘 다녀와, 그런 말을 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자는 소파에 앉는다. 역시 혼수로 장만한 40인치 벽걸이형 TV에선 아침드라마가 한창이다. 뭐랬니, 그래도 벽걸이로 사야 한다던 친구의 조언이 떠오르고, 사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들면서 그 순간 그만 커피의 향마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개 만혼(晩婚)이 추세여서 이 정도면 인생의 절반가량을 살아왔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다. 임신과 육아의 문제에 있어, 뭐랄까 그것은 또 현대사회의 급박한 변화와 추세에 발 맞춘다고나 할까, 또 여성의 능력 발휘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이기도 하며, 그런 역사적 과제의 실천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역량 발휘와 또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튼 아기를, 여자의 어머니나 남자의 어머니가 봐주는 게 도리이다(당신들의 안녕을 위해 도리라고 써주마). 서너살, 서너 군데의 학원을 다니기 전까지, 말하자면 그런 분위기에서 다시 아이들은 자란다, 큰다, 변태(變態)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제발로 학원을 다닐 때쯤, 어느새 남자와 여자는 어엿한 중년이 된다. 어김없이, 참고서와 문제집을 파헤치듯 개콘과 웃찾사를 보고 웃다가, 드라마를 보며 울다가, 금연을 하니 어쩌니, 웰빙이 어쩌니 저쩌니, 또 은근히 부모의 유산을 기다리다 보면(아, 아직도 부모가!) 어느새 인생의 대부분은 흘러가 있다, 있을 것이다.

과연 성인들의 사회냐

말하자면, 그래서 이 사회가 과연 성인(成人)들의 사회냐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 어떤 인종이, 도대체 어떤 민족이 이토록 오오래 부모의 경제력과, 치마폭과, 강령과, 손길에 연루되어 있는 걸까. 알 수 없지만 그토록 공부를 하고도, 존재적 독립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어떤 공부를 하기에!). 묻겠는데 처세와 재테크의 노하우를 제외하고, 당신의 정신세계는 어떤 성장을 해왔는가. 묻겠는데(긁적긁적), 그래서 털은 난 건지 어떤지… 왜냐면 비는 오고 우중충한데, 또 개개의 구성원들이 독립되지 못한 나라가 과연 독립국가인지 그런 상념이 들기도 해서, 나는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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