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왜놈’에게는 슬픔이 없을까요?
할리우드 영화 <람보>를 생각합니다. 람보가 M60을 한 손으로 들고 호쾌하게 쓸어버리는 대상은 베트콩입니다. 개미떼처럼 베트콩들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클로즈업되지 않습니다. 마치 삿갓을 쓴 마네킹 같습니다. 그들은 감정도 없고 역사도 없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미국 영화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한국 텔레비전의 사극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군들은 아주 단순화됩니다. 나쁘거나 혹은 우스꽝스럽거나. 여기에 한 일본 언론인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 특파원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이 일본과 일본인을 너무 터무니없이 묘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역사 고증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했습니다. 물론 한국의 언론과 네티즌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해!”입니다.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왜 하필 극우 인사로 소문난 구로다였는지…. 진지하게 맞장구를 쳐줄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왜놈, 아니 왜장에게도 슬픔은 있습니다.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도모유키>는 임진왜란을 독특한 시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한국 장수가 아닌 일본 하급 무사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1597년, 농부 출신으로 조선 출병에 끌려온 군막장 도모유키. 그는 조선인의 목을 베는 적장이지만, 조선 포로 명외에게 애절한 사랑을 느끼면서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다이묘의 성에 끌려갔다가 원치 않는 조선 출병에 동원된 히로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합니다. 히로시를 떠나보내고 소작료에 전전긍긍하며 마음의 병을 앓는 어머니 마사키와 아내 유키코는 조선의 민중들과 똑같은 얼굴을 지녔습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도 가족과 일상과 미래가 있었습니다. 작가 조두진씨는 “한국이나 일본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광복 60돌은 대단히 의미 있는 국가 경축일입니다. 이런 날을 맞아 언론들은 관행적으로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거나, 광복의 감격적인 풍경을 떠올리거나, 매듭되지 않은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규탄합니다. <한겨레21>은 그렇게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렸던 언론답게, 다른 식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한겨레21>은 평범한 일본인 가족의 눈으로 8·15를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눈으로 볼 땐, 꼭 평범하지만 않습니다. 할아버지 시노하라는 가미카제 특공대와 비슷한 ‘인간어뢰’ 훈련병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버지 시노하라는 격렬했던 전공투 시대를 통과했습니다. 아들 시노하라는 전쟁에 별 관심이 없고, 독도가 뭔지도 잘 모릅니다. 그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일본 현대사로 재구성됩니다.
20세기 한국에서 가장 잔인했던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저는 ‘빨갱이’와 ‘쪽발이’를 꼽겠습니다. 빨갱이와 마찬가지로, 쪽발이에 대한 맹목적 증오는 우리 사회를 반이성적 민족주의로 흘러넘치게 했습니다. 때로 반공과 반일은 쌍둥이가 됩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를 읽으며 민족의식에 회의를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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