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명숙/ 작가
거실 창문을 연다. 답답함을 없애려 방충망까지 다 열어젖히면 적당히 떨어져 앉아 있는 야산이 성큼 다가서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내 몸에 다가와 스치는 게 있다. 부드러운 실크 자락처럼 온몸을 휘감고 도는 실바람. 그 황홀한 결들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바람은 제 스스로 강약을 바꾸며 산들거리고 건들거리다 쾅 소리와 함께 열려 있던 방문을 난폭하게 닫아버리기도 한다.
바람의 애무, 바람과의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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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대도시를 벗어난 덕에 정말 오랜 만에 일상에서 늘 만나게 된 산과 바람. 눈을 감고 바람의 결과 소리와 향기에 취하다 보면 어느샌가 그 바람의 끝에서 아주 오래된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행복하다.
이 지구상에 바람이 존재한다는 걸 참으로 오래 잊고 살았다. 잊었던 연인처럼 문득 다가온 바람은 그 무엇보다 내 몸에 대한 각성을 자극한다. 깃털 같은 혹은 잔물결 같은 수만 갈래 바람의 결들은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며 마침내 우수수 깨어 일어나게 만들고야 만다.
바람의 애무를 받으며, 바람과 섹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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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섹스하는 내 몸은 ‘몸짱’이라는 천박한 시대의 유행어에 훈육되고 주눅든 억압된 신체가 아니다. 바람의 애무를 받는 내 몸은 자유롭고 넉넉하고 그득하다. 살아 있다. 내가 곧 내 몸이고 이 세상이 결국은 몸의 세상임을 늦게서야 소중하게 깨닫는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제 스스로 유혹인 바람을 맞고 보내면서 아득히 멀리서 손짓을 보내는 미지의 무언가에 가슴이 저린다. 자연이 가진 미덕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근원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움직임과 변화들. 깊이 모를 침묵과 귀청을 찢는 포효.
자연, 우주, 삶과 죽음….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그토록 확실했던 사람들의 일상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쓰나미나 허리케인이 아닌 한 줄기 실바람도, 32평 아파트에 2천cc 차를 몰고 5천만원 연봉으로 10년 안에 10억원을 모으려는, 앞으로 최소한 80살까지는 살 것으로 예측되는 너와 나의 단단한 ‘현실’을 한순간에 허방으로 만들 수 있다.
나는 그같은 바람의 타격을 사랑한다. 확실하고 안전한 우리의 일상이 근원의 손짓으로 자주 흔들릴수록, 꽃이 바람에 흔들릴 때처럼 우리의 삶에선 향기가 날 것이므로. 굳이 바람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본래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삶은 불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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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서 나는 내가 낯설고 내 삶이 난감하다. 그리고 그런 내가 좋다.
내일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면…
휴가철이다. 빽빽하게 들어선 콘크리트 고층건물들이 바람의 통로를 가로막는 도시에서 충혈된 눈으로 분초를 다투던 숱한 사람들이 모처럼 바람을 만날 수 있는 시기다. 이유도 모른 채 혹사당해 지친 몸을, 바로 당신이 그 육체를 바람 속에 세워보면 어떨까.
산이든 바다든 강가든,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는 유적지든, 텅 빈 동네의 어느 한구석에서든 바람을 찾아 그것을 느끼고 숨쉬고 듣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러다 보면 혹여 허파에 바람도 들 수 있고, 간덩이도 부을 수 있고, 예기치 못한 늦바람에 정신이 나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바람에게 물어보라. 모든 게 빤하고 안전해서 내일이 더 이상 새로울 수 없다면, 더 이상 설렘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곗바늘이 계속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인생의 무려 8할이 바람이었던 시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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