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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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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추억

등록 2005-04-27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 k21@hani.co.kr

베트남의 수도가 헷갈립니다. 누구는 호찌민이라 하고, 누구는 하노이라 합니다. 둘 다 틀렸다며, 사이공이라 우기는 이도 있습니다. 정답부터 말하면 북부 하노이입니다. 호찌민은 남부의 경제 중심지이지요. 사이공은 호찌민의 옛 이름입니다. 베트남전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난 1975년 그 이듬해, 남베트남(월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다소 무리한 비유를 하자면, 서울시가 김일성시로 바뀐 겁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베트남인들은 ‘사이공’을 버리지 않습니다. 공식 용어가 뭐든 간에,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사이공’이라 부릅니다. 사이공…. 왠지 이 이름엔 콜라 같은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본래 베트남어인지, 프랑스어인지, 크메르어인지 그 기원조차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발음해보세요, 사.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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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정권’으로 상징되는 남베트남이 패망한 지 30년이 흘렀습니다. 1975년 4월30일, 그날 미국도 함께 꽁무니를 뺐습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 가난한 농업국가인 베트남에 무조건 두 손을 든 것은 충격적인 역사의 사변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한쪽 다리를 걸쳤던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텔레비전 화면을 뒤덮던 보트피플의 잔영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가 될까봐 무서워 몸서리치던 어린 마음의 여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80년대 중반에 와서는 베트남의 또 다른 면을 보기도 했습니다. 남베트남 운동권 대학생들의 애환을 담은 <사이공의 흰옷>(응웬반봉)은 대학가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라이따이한을 두고 온 이들이나 불구의 육신, 고엽제 후유증을 안고 돌아온 참전군인들이 아니라면 한동안 베트남을 잊었습니다. 그저 우리와 한때 관계를 맺은 동남아의 한 공산국가였을 뿐입니다.

1993년 가을, 무작정 사이공으로 향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불현듯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베트남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이공의 맨땅에 헤딩하다 빈털터리가 된 적도 있습니다. 얼마 안 가 그는 베트남어와 베트남 역사에 가장 내공이 깊은 현지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힘으로 그는 한국인들에게 잊혀졌던 베트남을 상기시켜줍니다. 1999년 9월 <한겨레21> 베트남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군 작전지역’주민들의 가슴아픈 현장증언을 처음으로 전했던 구수정씨입니다. 그가 6년 만에 다시 어려운 인터뷰를 성사시켰습니다. 6개월여간 접촉한 끝에 얻은 결과입니다.

보응웬잡 장군 인터뷰의 다리 역할을 해준 보좌관은 연방 투덜댔다고 합니다. 애초에 20분으로 예정된 시간이 1시간까지 이어지자 이런 이야기로 눈치를 줬다는 겁니다. “<cnn>과도 15분밖에 안 했는데….” 그렇게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은 장군의 애정이었습니다. <한겨레21>이 전쟁의 진실을 밝혀왔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은 제가 지난해 12월 사이공의 전쟁박물관에서 선물로 받은 어린이 그림대회 수상작입니다. 이 그림은 씁쓸하면서도 따뜻합니다. 이제 2005년 4월30일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저는 ‘반전’을 생각하면서 평화롭지 못한 모든 삶들의 운명이 ‘반전’되기를 희망해봅니다.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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