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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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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

등록 2005-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최근 흥미로운 내용의 신간 한권이 출간돼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권위 있는 언론인 폴 존슨이 쓴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펴냄)이 그것인데, 지식인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루소, 마르크스, 톨스토이, 러셀,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의 업적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파헤친 소재가 이채로웠다. 폴 존슨은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가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겼고, 노동자 해방을 주창했던 마르크스는 45년간 가정부를 착취했으며,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면서도 여성과의 교제를 사회악이라고 주장했다며 그들의 모순된 삶을 꼬집었다. 지식인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독자들에게 지식인들을 경계할 것을 그는 주문하고 있다.

‘두 얼굴’은 국가와 사회에도 존재할 것이다.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 내치에도 신경써야겠지만 외교관계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일본이 최근 보여주고 있는 ‘두 얼굴’은 너무나 표리부동해 역겹기까지 하다. 한국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적극적으로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준비하고 분위기를 띄웠던 게 일본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파견된 외교관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망언을 하더니 한 지방자치단체는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보란 듯이 통과시켰다. ‘욘사마’ 열풍이 한-일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고 치켜세운 게 얼마 전이건만,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우리의 아픈 과거 상처까지 마구 들쑤셔놓는다.

그런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바보인지 순진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순수하고 착해 보인다. 그동안 독도 문제가 심심치 않게 불거졌지만 일본쪽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대응을 자제해왔다. 군대가 아닌 경찰로 하여금 독도를 경비케 하고 일반인의 입도를 불허했다. 신임 경찰청장이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독도를 방문하려다 외교부의 만류로 포기해야 하지 않았던가. 독도 사태 ‘덕분에’ 뒤늦게 그가 독도를 다녀올 수 있게 됐다니 씁쓸할 뿐이다. 일본만을 향해 그런 게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주요 국정목표로 내세웠던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이 중국 정부의 눈총을 받자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동체 건설’로 슬그머니 탈색됐다. 분단의 현실에서 배운 지혜일 수도 있고 이웃 나라들을 배려하는 넉넉함 때문이기도 해 결코 탓할 일만은 아니다.

일본이 ‘두 얼굴’로 우리를 대한다고 해서 우리까지 부화뇌동해 ‘두 얼굴’로 그들을 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독도 사태에 항의해 한강에 투신하고 집회 도중 분신을 시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예정돼 있던 한-일 스포츠 경기를 취소하고 일본인의 골프장 출입을 금지하는 옹졸함도 피했으면 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비장한 각오로 단호하게 맞서되, 민간 차원에서는 넉넉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일본을 대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독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이 2003년 7월이었다. 국방부 초청 행사에 갔다가 해군 초계기를 타고 상공에서 둘러본 독도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독도를 다녀와 당시 ‘만리재에서’(467호)에 이렇게 썼다. “…독도는 더욱 고독해 보였다. 난생처음 만난 독도의 모습이 유난히 외롭고 힘들어 보이는 것은 군사대국을 꿈꾸는 최근의 일본 움직임 탓이리라. 세찬 파도 한가운데서 한반도를 뒤로 한 채 홀로 외롭게 일본 열도를 노려보고 있는 독도.”

때늦은 감은 있지만 그 이름처럼 독도가 더는 고독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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