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곤/ 동국대 교수·신문방송학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소설 <제8요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폐허의 바르샤바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그네시카와 그녀의 연인 피에트레크는 단 하룻밤만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벽이 있는 공간’을 꿈꾼다. 피에트레크에게는 집이 없고 스물두살의 여대생인 아그네시카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단칸방에 살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연인은 친구의 아파트 키를 빌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온 그 아파트의 주인에게 몸을 뺏기고 만다.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8요일에나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오십년이 더 지난 이 이야기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해진다. 지금 집이 없는 한국의 청년에게도 제8요일은 점점 멀어지는 꿈일 뿐이다.
<제8요일>과 한국 청년… 집 사기 어렵다
월급을 모아 집을 산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서울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예전엔 운 좋은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았다지만 그것은 일부 부유층의 이야기일 뿐이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퇴직 뒤 평균 생존기간이 20년을 넘는다. 한국인의 평균수명 74살은 교통사고·자살까지 포함한 수치이니, 건강한 사람들은 정년을 맞은 뒤에도 대개 30여년을 더 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집을 줄여서 노년 생활비에 보태야 하는 마당에 자식에게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이제 주택 소유의 유무가 직업이나 학식이나 교양보다도 사람을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것 같다. 며칠 전 결혼한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신랑 될 사람은 집이 있니?” 하고 물어본 것은 주책없는 선생의 속물 근성 때문만은 아니다. 주택이 없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평생 대출금과 이자 상환에 허덕이느라 식생활, 여가생활, 양질의 자녀교육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사의 선승이나 골짜기 수도원의 수사가 아니라면 누구나 좋은 집과 좋은 음식, 좋은 교육을 꿈꾼다. 그 꿈은 사치가 아니라 인간이 진보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은 이 꿈을 빼앗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이 높은 주택가격이 국민의 생활을 옥죄고 서민의 행복을 가두고 청년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있다. 주택 소유의 여부는 지금 한국 사회를 가르는 가장 큰 균열 요인이다. 그럼에도 무주택자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은 부당하다. 오늘날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많은 국가들의 정당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와 산업노동자의 대립이 사회의 가장 심각한 균열 요인이라는 전제에서다. 그런데 이미 이 대립 구도는 허물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이 사무직 노동자의 그것을 따라잡은 지 오래다. 직업 유형보다 주택의 소유 형태가 정당 선택 기준으로 더 유효하다. 영국만 해도 1970년대에 이미 노동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임대주택 거주자냐 자가 소유자냐 하는 주택 소유 유형이 진보정당의 지지를 결정하는 더 현저한 원인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주택소유계급’(house-own class)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제 진보정치는 무주택자 또는 더 나은 주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정치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에는 진보정치가 없다. 틈날 때마다 자신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임에도.
정부는 아파트 값을 ‘잡겠다’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강조한다. 그런데 이 ‘잡겠다’는 표현이 도무지 시원찮다. 우선 ‘잡다’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잡겠다는 것인지, 떨어지지 않도록 잡겠다는 것인지, 올라가지도 떨어지지도 않도록 지금 수준에서 붙들어매겠다는 뜻인지 영 알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보수나 저 보수나 똑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자신은 진보라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주택계급의 시대에 진보의 증거를 확실히 보이는 일은 간단하다. 아파트 값을 ‘잡지’ 말고 확실히 떨어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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