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문학비평가
평소 임지현씨를 비롯해 탈국가주의와 탈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논자들의 생각에 많은 동감을 하고 있었다. 설사 그러한 주장이 국가나 민족간의 첨예한 이익이 대결하는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는 대안 없는 다소 공허한 논리에 해당된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사회에 미만한 지나친 민족주의적 성향을 교정해줄 수 있는 소중한 사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이타마 경기장이 궁금해진 축구 민족주의자
그러나 월드컵 예선이라는 A매치의 매력 앞에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폐해에 대한 내 사유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이 공허한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또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과 쿠웨이트의 경기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정확한 시간을 확인했으며, 설날인 그날 경기시간 전에 처갓집에 닿기 위해서 온갖 무리를 감수하는 열정(?)을 보였다. 적어도 A매치 경기에서만큼은 강력한 민족주의자가 되는 내 모습에서 지식인의 이중성과 허약함을 보는 동시에 국가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가 얼마나 강고하게 사람들의 내면에 각인돼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경기가 가까워올수록 정작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북한과 일본의 경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 12년 만에 다시 등장한 북한 성인축구대표팀의 실력도 너무 궁금했고, 특히나 일본과 경기를 한다는 사실이 묘한 역사의식과 정치적 정서를 자극했다. 그에 비하면 한국과 쿠웨이트간의 경기는 물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지만 이미 월드컵 4강이라는 황홀한 체험을 한 마당에 예선 한 경기 정도의 승패에는 초연하기로 일단 마음을 정리했다.
문제는 한국과 쿠웨이트의 경기와 북한과 일본의 경기 시간이 초반 30분만 빼고 거의 겹친다는 점이었다. 2월9일 저녁 7시30분부터 북한과 일본의 경기가 먼저 시작되었다. 시작하자마자 프리킥으로 한 점을 실점한 북한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상대적으로 매끄러운 패스워크와 공간 침투력을 과시하는 일본 선수들을 보며 국제 축구의 흐름에서 비켜서 있는 북한 축구의 한계를 절감하는 찰나, 화면은 8시부터 시작하는 한국과 쿠웨이트의 경기로 옮겨와 있었다. 순간 북한과 일본의 경기를 계속 보기 위해 <nhk>를 비롯한 수많은 채널을 돌려보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처갓집 TV의 어느 방송에서도 북한과 일본의 경기를 중계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북한이 대패하지 않기만을 염원하며, 한국과 쿠웨이트의 경기를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경기 내용을 보면서 내 눈은 상암 경기장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과 상상력은 계속 일본 사이타마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반전이 막 끝날 무렵 갑자기 화면의 한구석에서 북한이 한 골을 만회해, 1 대 1이 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남성철 선수와 동료들의 골 세리머니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개를 느꼈다. 그것은 한 어설픈 지식인의 감상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에 이 땅의 현대사를 거쳐간 모든 굴곡과 상처가 켜켜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뒤로 결과가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되는 한국과 쿠웨이트의 경기 내내 사이타마 경기장의 소식을 기다렸다. 북한과 일본의 경기가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되는 시간까지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만약 1 대 1로 경기가 끝났다면 그것은 대이변이었다. 국제 축구의 흐름에서 멀찍이 비켜서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0위권의 북한이 아시아 축구의 맹주인 일본과 적지에서 비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승리라는 상상력을 발동하는 순간, 화면에서는 로스 타임에 일본이 다시 한 골을 넣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 뒤, 경기가 2 대 1로 마감되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북한과 일본의 축구 재방송을 보면서, 북한 축구를 좀더 세밀하게 엿볼 수 있었다. 분명 예상했던 것보다는 한결 나은 실력이었지만, 현대적인 국제 축구의 흐름과 거리가 있다는 점도 사실이었다. 축구도 인간이 수행하는 일인즉, 그 사회의 전체적 모습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북한 축구에서 북한 사회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았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북한 선수들은 경기 뒤 인터뷰에서 6월8일 평양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엄청난 관중의 열기와 홈 어드밴티지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6월8일에도 한국의 경기보다는 북한과 일본의 경기를 보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 북한 선수들의 골 세리머니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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