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곤/ 동국대 교수·신문방송학
윌리엄 블레이드는 1880년에 나온 <책의 적들>에서 불, 물, 가스, 열, 빛, 먼지, 책벌레, 나태, 무지의 아홉 가지 적들이 책과 맞선다고 했다. 그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지금 ‘영상매체’라는 강적이 책을 위협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재작년에 나온 신간서적의 발행종수가 1997년에 비해 58.6%나 급감했다. 특히 91.2%나 줄어든 사회과학 서적을 비롯해 인문학 분야의 출판이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단군 이후 최대의 불황’이라는 말이 한국 출판계의 처지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대형서점 교보문고조차 개점 23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 감소를 기록했다. 동네의 작은 서점들은 거의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줄어가는 책, 줄어가는 사회적 자본
경제 불황이 이 사태의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들 하지만, 경기가 좀 나아진다고 해서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젊은 층의 활자 이탈은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대학도 사정은 같다. 잔디밭에서건 벤치에서건 책을 들고 있는 학생을 만나기 쉽지 않다. 옆에 친구가 앉아 있는데도 휴대전화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신문 또한 활자이므로 읽지 않는다. 특정 신문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젊은이가 그 신문을 읽지 않으며, 또 다른 신문을 찬양하는 대학생조차 그 신문에 난 기사를 알지 못하는 희극이 벌어지곤 한다.
이제 곧 인터넷이 책을 대신하고 디지털 이동매체가 신문을 대체할 것인가? 대답은 ‘아니오’가 아니라 ‘아니 되오’다. 활자매체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어온 것을 다른 매체들에게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활자매체가 식물성이라면 영상매체는 동물성이다. 움직이는 영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삼키려고 의도한다. 읽다가 생각에 잠길 수 없으며, 의심나면 다시 한번 읽을 수도 없고, 읽다가 덮어버리기도 어렵다. 책을 읽을 때는 주인공이 독자이지만 영상매체는 사람보다 더 세고 더 빠르다. 영상의 속도에 감정을 맞춰두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일을 남의 의도에 내맡기기 쉽다. 글 읽는 일은 그렇지 않다. 활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고, 앞장으로 되돌아가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속도를 읽는 자가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 일은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진검승부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일보다 귀찮고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레이 브래드베리의 소설 <화씨 451도>에 등장하는 미래 사회의 독재자는 파이어맨(Fire Man)으로 하여금 책이라는 책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불태우게 하고, 책을 읽는 자는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화씨 451도는 바로 책이 불에 타는 온도다. 폐쇄 사회를 유지하고, 평등의 환상을 심어주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책을 없애는 것이다. 어떤 매체보다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어떤 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은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눈엣가시다. 다행스럽게도 소설 결말에는 희망의 불씨가 보인다. ‘파이어맨’에 맞서는 희망의 집단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이들은 아예 책의 내용을 외워서 전승하는 움직이는 도서관이 된다. 어떤 이는 소크라테스를 또 다른 이는 플라톤을 이런 식으로 외운 책을 사람들에게 구술로 전함으로써 인류의 지적 유산이 사라지는 일을 막는 것이다.
십 몇년 전만 해도 하숙집 책장에 꽂아둔 책 한권 때문에 지하실로 끌려가서 두들겨맞곤 했다. 그래도 모두들 숨어서 끈질기게 읽었다. 이제 그런 억압은 없어졌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읽지 않는다. 유행하는 조폭 영화의 대사를 모르면 웃음거리가 되지만, 일년에 책 한권 읽지 않아도 소통에 아무런 지장 없는 곳이 한국 사회다. 어느 개그맨의 책 제목처럼 “하지 말라는 일은 다 재미있다”면 책 읽기를 금지하면 사정이 좀 나아질 것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활자의 위기는 경제위기보다도 더 위험하고 근본적인 위기일지 모른다. 도로나 항만과 같은 눈에 보이는 시설뿐 아니라 공동체 성원의 정신적 성장 또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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