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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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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의 위로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또 하나의 리모컨과 이별했다. 우리 집 리모컨이 옆집 리모컨보다 일찍 사망하는 이유는 빛의 속도에 가까운 채널 재핑, 일명 ‘채널 신공’에 있다. 몇 개월 전 그날 새벽에도 거실에서 채널 신공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 별 생각 없이 채널을 넘겼는데, 낯선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CCTV 화면이었다(중국공영방송 절대 아님). 채널명은 교통방송 케이블 채널인 ‘TV서울’이었다. 카메라는 어두운 강변북로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를 비추고 있었다. 차종도, 자동차 속 사람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화면은 서울 시내 주요 도로를 번갈아가며 비췄다. 지나가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어 적적할 때도 있었고, 순식간에 여러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때도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자동차만 도로 위를 지나가는 이 화면에 빠져들었다. 30분이 지나갔다. 집이 서울시 교통상황실도 아닌데, 그리고 서울 시내 교통 상황이 유일하게 좋은 새벽 시간에 CCTV를 틀어주다니,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라는 건가? 이 도시에, 이 새벽에 나 말고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굉장한 생방송을 보고 있구나. 저 사람들은 왜 이 시간에 달리고 있을까? 그러다 보니 1시간이 지나갔다. 다음날 ‘TV서울’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편성표를 뒤져봤다.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방송하는 이 프로그램 제목은 정직하게도 〈CCTV 방송〉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우울하거나, 심란하거나, 잠이 오지 않거나, 무한 상상이 필요하거나 할 때는 이 방송을 본다. 보고 있으면 희한하게도,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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