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한동안 잊고 지내던 가요 프로그램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순전히 태양의 때문이었다. 태양이 세트 바닥에 누워 춤을 추는 모습은 중독의 몸짓이었다. 그날도 TV 앞에 앉아 문화방송 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엄정화의 컴백 무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엄정화의 번쩍이는 〈D.I.S.C.O〉 뮤직비디오를 봤기 때문에 컴백 무대에 대한 기대치가 급상승했다. 무대가 시작됐다. 뮤직비디오를 옮겨놓은 듯한 세련되고 거대한 세트 위에서 엄정화는 춤을 췄고, 두 개의 무대가 겹쳐지면서 카메라는 재빠르게 엄정화를 포착해냈다. 무대 위에 설치된 LCD에서는 네온 색상의 화면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바뀌면서 흘러갔다. 〈D.I.S.C.O〉라는 곡이 갖고 있는 아우라와 가장 근접한 무대였다. ‘역시 쇼는 엄정화, 세트는 MBC’였다.
다음날, 〈SBS 인기가요〉에도 엄정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무대는 미러볼 등 몇 가지 설치물과 붉은빛 조명, 가끔 나오는 이산화탄소 연기가 전부였다. 분명히 같은 곡인데, 단지 세트가 다를 뿐인데, 전날 통통 튀던 〈D.I.S.C.O〉의 음색이 다르게 들렸다. 새삼스럽게 세트와 곡의 상관관계를 생각하게 됐다. 가요 프로그램의 수준이나 질은 가수나 진행자에 있지 않다. 그 가수와 곡을 무대 위에서 얼마나 잘 표현해내느냐, 빠르게 변하는 가요 트렌드를 얼마나 정확히 짚어 연출하느냐, 그게 재미있는 가요 프로그램과 그렇지 않은 프로그램의 차이다.
한 가지 걱정은, 엄정화가 이 곡으로 행사를 뛰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거. 아무것도 없는 체육관 같은 무대나 지역 행사 야외 무대에서 〈D.I.S.C.O〉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 상상해보라. 아, 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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