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nico@hani.co.kr
스무 살이 되고 나서 TV를 보면서 즐거웠던 순간은 교육방송을 비웃으며 채널을 돌릴 때였다. 고등학교 내내 졸면서 봐야 했던, 교육방송의 초록색 칠판과 흰색 분필은 더 이상 내게 필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 이후 10년 가까이 TV에서 분필 사각대는 소리만 나면 잽싸게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며칠 전 케이블TV 채널을 돌리다가 어딘가 분위기가 남다른 칠판을 보았다. 칠판에 정신없이 그래프가 그려져 있어서 처음에는 당연히 교육방송 수학 프로그램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분필을 든 강사에게서 교육자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채널은 주식 관련 채널이었고, 프로그램 이름은 이었으며, 제법 젊어 보이는 남자 강사는 주식 투자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중심이론이 어쩌고, 변곡점이 어쩌고…. 주식을 전혀 모르는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 5분 들으니까 지성이 아닌 감성이 동하기 시작했다. “계좌 깨지고 마음 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돌아버리는 거예요. 지지선이 무너지면 버려야 합니다. 빌린 돈이면 더욱더 버려야죠!” 맞아, 맞아. 이거 솔깃한데. 그렇게 10분을 경청했다. 그리고 채널을 돌려보니 이런 프로그램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교육방송이라고 짐작했던 채널 중 여럿이 주식 채널이었으며, 강사가 색색의 분필을 던져가며 열을 올렸던 강의 중 여럿이 주식 투자 강의였다. 다시는 보지 않을 줄 알았던 칠판과 이렇게 다시 마주해야 하다니, 살짝 서글퍼졌다. 잠깐 주식에 혹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수능은 재수할 수라도 있지만 주식은 계좌 깨지면(!) 그걸로 끝이다. 수능 문제에는 정답이라도 있지만, 주식에는 정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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