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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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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촌에 숨은 보석 ‘호밀밭’의 농부들

인천 계양 편
귤현동의 특별한 정원들… 마음을 비우고 ‘두 밭’ 돌보기
등록 2025-05-01 22:45 수정 2025-05-04 06:05
‘호밀밭’에 심을 씨생강을 다듬는 나무네 부부.

‘호밀밭’에 심을 씨생강을 다듬는 나무네 부부.


6년 전 이맘때, 지금 살고 있는 인천 귤현동에 처음 집을 보러 오던 날을 잊지 못한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동네로 들어오는 동안 밭이 펼쳐졌고, 작은 단층 빌라 옆마다 텃밭이 하나씩 있었다. 한국에도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작은 정원’이란 뜻으로 농막과 작은 텃밭을 함께 분양하는 도시농업 구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동네의 텃밭들은 계획적으로 조성된 것도 아닌데다 재개발이 진행 중이었는데, 동네 풍경을 이상하게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건물을 짓지 않은 땅마다 누군가 텃밭을 일구고 있었고, 그런 땅이 많아 마치 빌라마다 작은 텃밭이 딸린 모습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3기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며 그 많던 논밭이 공사장으로 변했고, 텃밭이었던 땅에는 건물이 하나둘 지어지고 있다. 이제는 텃밭을 할 만한 땅이 숨은 보석같이 드물어졌다.

‘동네 사람’이라는 정확한 정의는 모르겠지만 그런 땅을 쓸 수 있는 정보는 알고 지내는 이웃이 많은 진짜 동네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레기 문제로 주말농장 주인 할아버지와 옥신각신하던 그날, 내 틀밭 일부분을 함께 쓰고 있던 동네 친구 나무가 뜻밖의 정보를 전해줬다. “우리 집 주변 빌라 부지에 농사지을 사람을 구한다는 팻말이 있는데 거기 한번 같이 알아볼래요? 사실 저도 쓰고 싶었는데 너무 넓어서 엄두가 안 났거든요.”

나무의 안내로 단숨에 달려가 팻말에 적힌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그 땅 바로 앞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가 전화를 받고 나와 젊은 사람들이 이 땅을 쓰겠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며 연간 사용료로 25만원만 달라고 했다. 삼면이 빌라에 둘러싸여 있지만 지금 밭보다는 해도 잘 들고 평지에 땅도 넓었다. 140평 빌라 부지를 조금씩 쪼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차장과 작은 텃밭을 분양했고, 할머니가 농사짓는 공간도 있지만 절반 정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자리에서 네고도 없이 쿨하게 입금을 마쳤다.

새 밭이 생겼으니 텃밭 이사라도 가볼까?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마음속으로는 텃밭 이사 계획까지 마쳤지만 며칠 뒤 주인 할아버지는 쓰레기를 전부 정리하고 다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다시 생각해보니 주말농장 밭은 건설해놓은 것도 많고, 자리잡은 다년생 작물도 많아 쉽사리 이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졸지에 돌봐야 할 밭이 둘이나 생긴 나와 나무는 ‘이 밭’ ‘저 밭’으로 부르다보니 소통이 어려워 새 밭은 ‘호밀밭’으로 이름 지었다. 물을 쓸 수 없어 호밀을 적극적으로 키워 덮개작물로 쓸 생각에 전반적으로 호밀을 뿌렸기 때문이다.

주말농장 밭과 다르게 빌라 부지인 호밀밭은 언제든 빼도 좋을 가벼운 밭으로 일구기로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호밀밭의 쓰레기를 줍고 호밀을 뿌리고, 다시 쓰레기를 주우며 땅을 만들고 있다. 농번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척추가 끊어질 것 같지만 호밀이 올라오자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이 아릿한 통증만큼 나에게도 큰 공부가 될 테니까.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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