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배기에 넣기 위해 보리·무·알팔파 등의 새싹씨앗을 물에 불리고 있다.
저무는 해가 아까워 텃밭 동무들이 모였다. 2023년 한 해 농사를 정리하고, 내년 농사 얘기를 나누는 자리다. 2023년 12월23일 한껏 추워진 날씨를 뚫고 모인 6명이 대낮부터 오겹살을 굽고 막걸리를 부었다. 거나해지면서 서툰 정치 토론을 작파하고 농사 얘기로 옮겨갔다.
봄에 첫 삽을 뜨면서 새긴 “뭘 자꾸 멕여야 한다”는 다짐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열댓 종류나 심고 뿌린 잎채소는 풍성했고, 방울토마토·가지·오이·호박에 옥수수까지 열매채소도 심심찮게 맛봤다. 대풍을 이룬 고추로 담근 장아찌는 한참을 먹었는데도 아직 반통 이상 남았다. 텃밭에 올 때마다 어김없이 한 꾸러미씩 챙겨 돌아갔다. 모두들 만족감을 표했다.
2022년에 ‘폭망’했던 김장 농사도 2023년에는 ‘선방’했다. 김장도 그렇지만 남은 배추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볕 안 드는 베란다 한편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국·전·쌈·나물 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반쯤 언 무도 남은 김장 양념으로 버무려 익혀놨더니, 꽁치나 고등어를 조릴 때 ‘명품 조연’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이야기가 작두콩으로 이어지자 밭장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동무들 모두 올해 집에서 가장 ‘칭찬받은 작물’로 작두콩을 꼽았다. 2024년에는 재배 면적을 늘리기로 일찌감치 합의를 봤는데, 밭 앞쪽과 뒤쪽으로 고랑 몇 개를 더 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오자 ‘희망 작물’ 제안이 쏟아졌다. ‘이걸 더 심자, 저걸 더 뿌리자’는 얘기가 한참이나 오갔다.
올해 포기했던 감자도 내년엔 한 고랑 다시 심기로 했다. 네 종류나 심었던 고추는 줄이고, 한동안 무심했던 당근을 다시 심으면 어떨까? 아이들이 어릴 때 밭에 와서 쏙쏙 뽑아 먹는 게 예뻐, 한동안 당근 농사에 열심이었다. 사춘기로 접어든 아이들이 더는 밭에 따라오지 않으면서 어느 순간 당근도 텃밭에서 사라졌다.
길게 네 고랑이나 심었던 고구마 재배 면적도 조정하기로 했다. 대신 한 고랑만 심었던 옥수수를 늘려 심으면 어떨까? 예전 밭(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에서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해바라기를 몇 주 심는 것도 괜찮겠다. 2023년 봄 씨앗 한 봉지를 휘휘 뿌린 밭 곁 언덕에서 새 봄엔 취나물을 만날 수 있을까? 3년차로 접어든 도라지와 더덕은 꽃구경이라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명색이 도시 농부니 <농민가>라도 불러야 했다. 할아버지가 된 선배와 50대 후배들이 어깨동무하고 부른 노래는 철 지난 발라드였다. 사장님의 후한 ‘서비스’ 덕에 목이 다 쉬어서야 노래방 문을 나섰다. “낼 밭에 함 안 가볼라요?” 양파밭에 만들어둔 간이 비닐터널이 쌓인 눈에 무너지지나 않았을까 밭장이 조바심을 낸다.
어둑해져 집으로 향하며 문득 떠올렸다. “다음 주말엔 뭐 하지?” 두 달 이상 남은 겨울을 버텨낼 궁리를 해야 할 때다. 창고 한 귀퉁이에서 새싹재배기를 꺼내 씻었다. 지난겨울 종류별로 사놨던 씨앗도 서랍장에서 찾았다. ‘콜라비, 브로콜리, 무, 보리, 겨자, 알팔파, 유채, 적양배추, 치커리….’ 도시 농부의 ‘겨울 블루’를 달래줄 비책이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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