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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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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튤립을 키우며…‘상추 지옥’ 자리에 심은 꽃

인천 계양구 편
꽃집에서 산 꽃보다 오랫동안 싱싱해
등록 2023-04-21 01:56 수정 2023-04-29 04:52
꽃밭으로 꾸며놓은 틀밭.

꽃밭으로 꾸며놓은 틀밭.

주말농장이 개장하고 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밭에 상추가 가지런히 심긴다. 적상추, 청상추, 오크상추, 로메인, 적겨자…. 국내 종묘사에서 유통하는 씨앗으로 모종을 낸 쌈상추들이다. 봄에 맛보는 노지상추는 부드러운 식감에 고소하고 짭조름한 다채로운 상추 본연의 맛을 느끼게 해 마트에서 파는 상추와는 정말 다르다. 게다가 웬만한 열매채소는 절기상 입하(2023년은 5월6일) 이후에 심어야 하니 주말농장의 첫 즐거움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상추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상추의 덩치가 본격적으로 커지면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는데 바로 상추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난다는 것이다. 주변 도시농부들은 그걸 ‘지옥문이 열린다’고 말한다. 비슷한 상추를 키우는 주말농장 이웃 모두 상추 지옥을 해결해야 하는 처지라, 지나가는 사람 누구든 잡고 상추를 주려 한다. ‘상추 지옥’을 몇 해 겪은 뒤로 아무리 맛있어도 쌈상추는 심지 않게 됐다. 약삭빠른 나는 상추를 심기보다 얻는 것을 택했다. 

몇 년 전 장마가 끝날 무렵 누구든 잡고 오이나 가지, 토마토를 줘야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내 ‘지옥’은 크라프트지(무표백·무코팅 종이)에 둘둘 말린 주황색 태슬꽃과 분홍색 달리아 꽃다발과 맞교환됐다. 당시 도시 텃밭에서 달리아를 기르는 공동체 ‘블루밍 달리아 프로젝트’를 운영하던 김현아 정원활동가의 선물이었다. 그 역시 주말농장을 하며 수확한 농작물을 선물하면 고마워하면서도 요리해야 하는 부담에 난처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꽃을 키우게 됐다고 한다. 그는 2021년부터 자신과 같은 정원활동가들을 연결하는 비영리 스타트업 ‘마인드풀가드너스’를 이끌고 있다.

여태까지 꽃은 카밀러·카렌둘라나 마리골드처럼 먹을 수 있으면서 농작물에 좋은 영향을 주는 ‘동반식물’ 구실을 하는 종류만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듬해 정원활동가가 분양해준 달리아 구근을 심으며 먹지 않는 꽃도 텃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농작물은 ‘지옥문’이 열리지 않을 만큼만 심고 남는 자리에 더 많은 꽃을 키워 우리 집은 물론 단골 가게와 친한 친구들의 집에도 선물한다.

맨땅에서 강하게 큰 꽃은 텃밭 채소처럼 흠집도 있고 조금은 개성 있는 모습이지만 꽃집에서 산 꽃보다 오랫동안 싱싱하다. 2022년 영국왕립원예협회의 ‘지구친화적 가드닝 캠페인’(Planet-friendly Gardening Campaign)에는 ‘꽃가루 매개자를 위한 식물을 심고 절화(가지째 꺾은 꽃. 꽃집에서 꽃다발로 포장해둔 그 꽃이다)를 소비하기보다 직접 키워서 사용하라’는 내용이 있다. 절화를 키우고 수입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농약과 에너지, 쓰레기가 많이 발생하기에 꽃을 직접 키워 쓰는 것이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벌과 나비에게 양분도 준다. 그러니 먹지 못한다고 차별 말고 골고루 기르자!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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