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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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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피해지, 자연에 맡겨야 잘 살아난다

‘2000년 산불 피해 복원 매뉴얼’과 달리,
불에 잘 타는 침엽수림 집중 조성한 정부 정책 논란
등록 2022-06-17 00:15 수정 2022-06-17 14:41
경북 울진 북면 나곡리 도화동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숲은 2000년 동해안 산불 뒤 큰 예산을 들여 복원한 지역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일어난 산불로 인해 인공조림한 나무가 모두 재가 돼버렸다.

경북 울진 북면 나곡리 도화동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숲은 2000년 동해안 산불 뒤 큰 예산을 들여 복원한 지역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일어난 산불로 인해 인공조림한 나무가 모두 재가 돼버렸다.

산불 피해지에서 불탄 나무를 모두 베고 소나무 위주로 새로 심는 산림청의 정책이 2022년 상반기 일어난 동해안 대형 산불의 원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산림청 정책은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2000년 동해안 산불 뒤 사회적 합의로 만든 ‘2000년 산불 피해지 복원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산림청이 사용하는 매뉴얼은 2002년과 2005년 대형 산불을 거친 뒤 산림청이 내부적으로 내용을 더해 2006년 만든 것으로, 2000년 매뉴얼과는 차이가 있다. 전문가들은 ‘자연복원’을 강조한 2000년 매뉴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문가 176명 공동조사 뒤 보고서 발간

2000년 4월7일부터 15일까지 190시간 동안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산불이 동해안 지역을 휩쓸었다. 산불은 강원도 고성에서 일어나 강릉, 삼척, 동해, 경북 울진 등 5개 시·군으로 번졌다. 이 산불로 2만3783㏊(헥타르)의 산림이 탔다. 17명이 죽거나 다쳤고, 850여 명이 집을 잃었다. 715개의 주택과 건물, 시설이 파괴됐다. 피해 금액은 360억원이었다.

이 산불은 정부 정책을 바꿨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형 산불이 일회성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고,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했다. 민간과 정부, 대학, 연구소의 전문가 176명이 9개 분야에서 19개 팀으로 나뉘어 ‘동해안 산불 피해지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2000년 12월 ‘동해안 산불 지역 정밀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이른바 ‘2000년 매뉴얼’이다.

이 보고서는 산불 피해 지역 복구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산불 피해지의 생태환경 요소와 사회정책 요소를 모두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도록 했고, 수관층(나무머리층) 유지 여부, 인공림-자연림 여부, 식생 피복도(땅에서 식물의 점유 비율), 땅의 경사도, 교목(큰키나무) 피복도, 임지(숲) 생산력 등 다양한 판단 기준을 검토해 복원 방식을 결정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자연복원 비율을 높였다. 수관층 유지 지역은 모두 자연복원으로 결정됐고, 수관층 소실 지역도 피복도가 3분의 2 이상이고 교목 피복도가 3분의 1 이상이면 역시 자연복원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결정된 인공복원과 자연복원의 비율은 51.5 대 48.5였다.

당시 이 연구에 참여한 정연숙 강원대 교수(생태학)는 “인공림 조성을 폭넓게 허용해 자연-인공이 반반이 됐지만, 당시에도 자연복원이 가능한 지역은 81%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인공복원 확대하자 침엽수 비중 37%→79%

문제는 이 2000년 매뉴얼이 시간이 지나면서 인공복원을 확대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었다는 점이다. 산림청은 2002년 충남 청양·예산에서 산불이 일어나자 의사결정 흐름도를 바꿨다. 기존 기준 중 식생 피복도와 교목 피복도를 없애고, 대신 해당 지역에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의 맹아(움싹)가 나는지, 두 나무의 맹아가 ㏊당 3천 개를 넘는지 평가했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는 이 기준이 너무 좁고 자의적이라고 지적했다. “동해안에선 자연 상태에서 신갈나무나 졸참나무의 싹이 가장 많이 나오고, 그 밖에 다양한 활엽수가 올라온다. 많은 나무를 평가 기준에서 모두 배제했다. 나무 종류를 제한했으니 그 맹아의 수도 줄어 자연복원 비율이 줄어든다.”

산림청은 2005년 강원도 양양에서 산불이 일어나자 이 매뉴얼을 다시 개정했다. 피해도가 낮은 경우만 자연복원하고 나머지는 모두 인공복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청양·예산의 산불 피해지 복원에선 자연복원 47.2%, 인공복원 52.8%가 적용됐다. 인공복원하는 경우 모두베기 뒤 심기 방식이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인공복원 방식이 늘어남에 따라 침엽수(소나무 등)와 활엽수(참나무 등)를 심는 비율도 크게 달라졌다. 2000년 매뉴얼에 따라 2000년 동해안 산불 피해지에서 인공조림한 활엽수와 침엽수 비율은 63.3% 대 36.7%로 활엽수가 훨씬 높았다. 그러나 2006년 매뉴얼이 적용된 2017년 강원도 삼척 산불 복구에선 침엽수가 69.9%, 활엽수가 30.1%로 다시 뒤집혔다. 인공복원을 강조한 2006년 매뉴얼의 영향으로 보인다.

정연숙 교수는 “2000년 매뉴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복원을 더 확대해 산불을 막고 숲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 기후나 지형을 보면 벌써 참나무 등 활엽수 숲으로 바뀌었어야 한다. 억지로 소나무숲을 유지하려다보니 산불이 나고 자연이 훼손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산림청은 2000년 보고서를 매뉴얼로 인정하지 않는다. 전덕하 산림청 산림자원과장은 “2000년 많은 전문가가 모여 만든 것은 백서이고, 매뉴얼은 2006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현재 업데이트 중이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인공복원과 소나무 위주의 산림 정책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상규 한국산림기술인협회장은 “소나무 단순림으로 조성하면 불이 쉽게 나고 잘 번진다는 점이 명확하다. 송진이 기름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현재 동해안 쪽의 50% 이상이 소나무 단순림이다. 소나무 단순림을 소나무 50% 대 활엽수 50% 정도의 혼합림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말했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이제 동해안 쪽에 집중적으로 소나무 심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송이와 금강송이 이 지역에서 신앙과 같은데, 이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30년 뒤 기후변화로 남한에서 소나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산불 피해지 복원은 되도록 자연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무엇을 위한 소나무숲 조성인가

홍석환 부산대 교수는 동해안 산불 지역에서 소나무숲 유지가 산림청을 위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동해안에 소나무숲을 유지하면 계속 산불이 날 것이고, 산불이 나면 모두베기, 소나무 심기, 임도 조성, 장비 구매, 사방 공사 등 예산과 일거리가 쏟아진다. 반면 동해안 숲을 자연 상태로 두면 산불이 적게 일어나고, 산불이 일어나도 복원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산림청으로서는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이에 대해 남상현 산림청장은 “생태주의자들은 동해안 숲을 자연 상태로 두면 활엽수로 바뀐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림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고, 정부나 산주의 목표에 따라 산림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 산림이 가지는 사회·경제·환경적 측면, 기후와 토양, 지형 조건 등을 모두 검토해 종합적으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글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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