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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위험한 학교

등록 2020-10-10 16:40 수정 2020-10-11 09:12
1333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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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집 앞으로 또 찾아와 이름을 부릅니다. 술 취한 목소리는 창문을 넘어 이불 속까지 파고듭니다. 혼자 집에 있는 날이면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칠 만큼 무섭습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학교에 가면 그 선생님과 마주해야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가까이 사는 친구가 털어놓았던 고민입니다. 스토킹이란 말도 몰랐던 우리는 하루빨리 졸업하기만을 바랐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난 옛일이지만 학교는 여전히 성폭력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2019년 교육부의 ‘중·고등학교 양성평등 의식 및 성희롱·성폭력 실태 연구’를 보면, 전국 중고생(응답자 14만4472명)의 25.4%가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3%는 불법촬영 및 유포 피해를 입었는데, 교내 혹은 학교 밖 학업 활동에서 일어난 경우가 67.2%로 조사됐습니다.

제1333호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학교를 경험한 10·20대를 만났습니다. 경남 김해의 한 고등학교 여자화장실에서는 지난 6월24일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됐습니다. 경찰 수사 결과, 이 학교 체육교사인 윤아무개(40대)씨가 범인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디지털포렌식 해보니 그가 근무했던 경남 고성군의 고등학교 여자화장실(2017년)과 경남 남해군 학생수련원의 여교사 샤워실(2019년)도 불법촬영한 사진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불법촬영지’가 됐던 학교의 학생들은 피해 사실을 경찰 수사 때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김해의 고등학교에선 갑자기 선생님이 출근하지 않으니까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소문만 나돌았습니다.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야 이 사건을 알았습니다.

졸업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성의 고등학교를 다닌 졸업생 14명은 ‘불법촬영 교사 대응모임’을 꾸려 경찰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수사 중이라 답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불법촬영물에 얼굴이 찍히지 않았고, 찍혔더라도 피해자를 불러 얼굴을 대조하는 건 2차 가해라며 그 누구도 ‘법적으로’ 피해자라 특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 방청석에 앉아 있지만 피해자가 아니니까 공소장 등 사건 기록을 열람할 권한도, 피해자로 재판에서 증언할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디지털성범죄가 학교에서 일어나면 늘 반복되는 일입니다. 2019년 2월 교육부가 ‘학교 내 성희롱·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내놓았지만, 디지털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범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사건 정보를 어느 정도 공유할지, 실질적인 피해자 지원과 예방책은 어떻게 가능할지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탓입니다.

교사 불법촬영 범죄가 알려진 뒤인 7월20일 박종훈 경남교육감은 “강력한 징계와 빈틈없는 점검, 철저한 예방교육으로 성폭력 없는 안전한 경남교육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안전한 학교는 말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제1332호 73쪽에 소개된 한가위 퀴즈큰잔치 1등 상품 기아자동차 모닝의 사진이 좌우가 뒤바뀌어 인쇄됐습니다.

한가위 퀴즈큰잔치 응모 마감일을 10월9일에서 10월16일로 변경합니다. 추석 연휴 우편물이 많아 <한겨레21> 배송이 평소보다 늦어졌고, 10월9일이 공휴일(한글날)이라 응모엽서에 소인을 찍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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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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