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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장마, ‘기후위기’ 기획의 배후 조종자

등록 2020-09-05 02:10 수정 2020-09-11 01:19
그래픽 장광석

그래픽 장광석

어쩌다보니 ‘대기획’이 되었습니다. 6월20일 처음 기사를 쓰겠노라 마음먹었는데 8월27일에 마감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기획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7월16일에 마감하려던 기사였습니다. 여름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인 초복에 맞춰 ‘폭염’ 기사를 내놓으려 했습니다. 그땐 그럴 만했습니다. 서울에선 6월9일 이미 첫 폭염특보가 발효돼, 코로나19로 마스크를 한 시민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습니다. 1973년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 폭염 일수가 가장 많았던 6월로 기록됐습니다. 여기에 기상청의 끔찍한 예보도 더해졌습니다. 2020년 7·8월은 1994년과 2018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폭염의 나날이 이어질 거라는 전망이었습니다.

기획은 투트랙으로 착착 진행됐습니다. ‘코로나19(재난)×폭염(재난)’이라는 이중 재난 시대에 더욱 고통받을 주거 취약계층의 실태를 취재하는 한편, 2019년처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과 공동기획으로 농민과 건설노동자 100명을 섭외해 ‘폭염이 야외 노동자의 업무 효율에 미치는 영향’을 한 달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왔습니다. 제주(6월10일)를 시작으로 중부지방(6월24일)으로 확대된 장마는 여름의 절정기(7월 마지막 주~8월 첫째 주)를 덮어버렸습니다. 뉴스룸에선 ‘폭염 기획이 아니라 폭우 기획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섞인 걱정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비는 54일간(중부지방 기준 최장 장마)이나 이어졌고 결국 참담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누구도 예측 못한 결과였으나, 어찌 보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습니다. 집중호우, 산사태, 폭염은 가뭄, 산불, 고수온, 냉해 등과 함께 기후위기의 대표 사례니까요. 그렇게 폭염 기획은 잔인했던 여름을 거치며 기후위기 기획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0년의 기후위기’를 기록하려 청소년기후행동 소속 10대, 20대 활동가들과 양계장, 체리밭으로 변한 사과밭, 양식장, 산사태 현장을 찾아다녔습니다. 누구보다 기후위기의 위험성을 잘 아는 그들도 처참한 재난 현장을 목격하고는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건 코앞에 펼쳐진 기후재난의 현상이 아니라, 그에 대처해온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식당에 갔을 때 김보림·박선영·전주원 활동가는 고기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해양 쓰레기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수아 활동가는 매주 집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무게를 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 초 4.8㎏이던 쓰레기를 최근 2.3~2.5㎏까지 줄였답니다. 기후재난에서 살아남으려는 본능과 같은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들과 만난 뒤 저도 달라지려 합니다. 집에서 열대야를 피하려 밤에 계속 틀어두던 에어컨에 2시간 예약을 걸어두고 굳이 고기반찬을 만들지 않습니다. 때로 ‘보온 99시간’을 찍기도 했던 전기밥솥으로 매일 하루씩 밥을 합니다. 정부가 탄소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정책을 쓰지 않는 상황이라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내가 내뿜는 탄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말입니다. 아직은 ‘본능’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초보의 실천이라 때로는 까먹고 때로는 모른 척 건너뛰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모두의 지구를 위해 덜 먹고 덜 쓰고 더 불편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립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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