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이라는 그 사람, 그 자리, 그 위치에 다른 사람을 세워볼까요? 오세훈(전 서울시장)이 됐든 누가 됐든. 그래도 그들이 똑같이 이야기할까요?”
오일장으로 치러진 서울시장(市葬),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 ‘결정적 증거를 내놓으라’는 요구, 피해자 변호인의 이력에 대한 공격. 전화기 너머 나민수(가명)씨는 성희롱·성추행 의혹의 당사자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는 비난하는 ‘86세대’ 남성들의 ‘2차 가해’를 조목조목 짚었습니다.
그 역시 86세대 남성입니다. 오랜 시간 노동운동을 하며 시민운동가 박원순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다수의 86세대와 달리, 박 전 시장이 아닌 피해자 편에 서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노동과 환경, 젠더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해, 진보 진영의 ‘편 가르기’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핵심은 성차별, 성적 괴롭힘을 인지하는 민감성(성인지 감수성)이었습니다. “요즘 서울에서 울산까지 우등 고속버스를 혼자 타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남성들은 ‘와, 사람 없어서 편하다’ 하죠. 그런데 여성들은 바로 ‘무섭다’고 느끼죠. 그걸 우리는 모르고 살았어요. 한국 사회에서 50대 남성이면 그 자체로 특권이라는 사실을요.”
3.2%. 나씨처럼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50대 남성을 어림잡은 수입니다. 7월22일 <한겨레21>이 ‘오픈서베이’로 전국 20~59살 남녀 5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외모에 대한 칭찬도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문항에 50대 남성의 3.2%만 ‘매우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20대 여성의 응답률(37.1%)과 10배 차이가 나는 결과입니다.
3.2%와 37.1%. 이런 인식의 격차는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까요. 50대 남성이 성희롱·성추행의 개념과 사례를 열심히 학습하고 이를 직장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구호를 외친다고 성인지 감수성이 절로 높아지진 않습니다. 일단, 여성들이 지금 직장에서 어떤 성적 괴롭힘과 성차별을 겪고 있는지, 이를 알렸을 때 어떤 뒷감당을 해야 하는지, 왜 ‘박원순 사건’에 분노하는지에 대해 가만히 들어봤으면 합니다. 물론 그런 과정이 ‘내 생각이 정말 옳은지’ ‘내 행동과 말이 누군가에게 폭력과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돌이켜보는 성찰로 이어진다면 더 좋겠지요.
속성 과정은 제1323호 ‘성희롱 피해자한테서 내가 보인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 제시돼 있습니다. 한 여성은 50대 남성 스스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갖길 충고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 젊은 여직원이 상냥하게 대하니 좋죠? 상사라서 그런 거지 사랑하는 거 아닙니다. 그 여성들도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 20년차 로맨스는 없으니, 정신들 차리세요.”(sbja****)
한 남성은 ‘역지사지’를 권합니다. “남자라서 성차별이나 성희롱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인종차별은 많이 받아봤죠. 인종차별을 받은 경험담을 얘기하면 가끔 백인 남자들이 ‘난 그런 거 경험한 적 없다’ 혹은 ‘뭐 그런 게 인종차별이냐’ 하는 등 당할 수 없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상황을 판단하려고 합니다.”(taeh****) 이런 조언들이 누군가에게 그저 불편하고 불쾌한 비판으로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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