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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토크] 고용위기 치명율 높인 ‘기저질환’

등록 2020-04-18 06:40 수정 2020-05-06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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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8호 표지이야기가 보도된 뒤 카카오톡 메시지가 하나 왔습니다. 대한항공 지상여객 업무를 하던 노동자 김성원(38·가명)씨가 보낸 것입니다. 그는 대한항공이 하도급을 준 인력공급업체, 이른바 아웃소싱업체 소속으로 일해왔습니다. 코로나19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회사에선 3월 중순 ‘사직’을 권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퇴직해서 실업급여를 받다가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채용하겠다”는 약속이었죠. 실업급여라도 받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김씨는 회사를 관뒀습니다. 그런데 원청이 김씨가 속한 업체에 하도급 계약 해지를 통보했습니다. 나중에 사정이 나아져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다들 어렵다고는 하지만, 먼저 피해를 입고 죽는 것은 ‘을’들인 것 같아요. 대한항공 정규직은 유급휴직이라던데….”

지난 2주간 인천국제공항과 영종도를 드나들며 만나고 이야기 나눴던 20명 가까운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상황은 김씨와 똑같았습니다. 이름과 소속업체, 하는 일만 달랐을 뿐 연차휴가 소진, 무급휴직, 권고사직, 정리해고라는 기본적인 틀은 똑같았습니다. 사용자의 일방적인 태도에 분노하는 것도 똑같았습니다.

코로나19로 공항 노동자에게 불어닥친 고용 위기가 위험한 이유는 한국 노동시장의 ‘기저질환’ 때문입니다. 원·하청 간접고용과 취약한 사회안전망이라는 그 기저질환 말이죠. 공항 노동자만 그 질환을 앓는 것은 아닙니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특수고용 노동자도 코로나19로 인한 고용 위기에 취약하고 치명률 역시 높습니다. 이미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구직급여(실업급여) 신청자 수 급증 등 암울한 고용지표가 그것을 방증합니다.

정부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용유지지원금 지급 기준을 완화하고, 무급휴직 노동자 긴급생계자금 지원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고용유지지원금은 사업주의 ‘선의’에 기대는 것일뿐더러, 고용 ‘유지’보다 ‘조정’을 위해 존재하는 ‘전문 아웃소싱’ 업체에는 아무런 약발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무급휴직 노동자 생계자금의 경우에도 지급 규모가 워낙 작아, 당장 생계에 위협받는 노동자에게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고용을 유지해야 코로나19가 한풀 꺾인 뒤 경제회복에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동 금지’ 명령을 내린 다른 국가에 견줘 사정이 낫기에, 고용만 유지된다면 경제위기 극복이 더 빠를 것으로 기대됩니다. 문제는 “고용을 유지하라”는 메시지를 기업에 너무 늦게 내보냈다는 점입니다. 이탈리아처럼 60일 동안 해고를 금지하라거나, 프랑스처럼 파견·계절 노동자 고용을 유지하라, 독일처럼 임시직 노동자 고용을 유지하라 등 정부 대책이 일찌감치 나왔어야 합니다.

가장 쉬운 비상경영 수단인 ‘인건비 절감’을 이행한 기업들이 앞다퉈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합니다. 정부는 100조원 웃도는 돈을 기업에 지원하겠답니다. 이제라도 조건을 내걸어야 합니다. 고용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 말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기업 구제금융 조건으로 고용 유지와 임원 상여금, 주식 배당, 자사주 매입 제한을 명시했습니다. 그 조건을 걸지 않는다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치명률’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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