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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프리존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12-17 11:16 수정 2020-05-03 04:29

집을 나서 두세 발짝 내디디면 승강기다. 버튼을 누르기 전 옆집을 힐끔 훔쳐봤다. 문에 경고문이 붙어 있다. ‘CCTV(폐회로텔레비전) 작동 중’. 초인종 누르는 자리에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가 박혀 있다. 들킬까봐 얼른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피한다. 천장에 붙어 있는 잠자리 눈이 내려본다. 승강기에서 내려 몇 발짝 떼니 머리 위 현관에 또 하나, 계단을 내려서니 앙상한 뼈대에 기다란 주둥이를 내민 CCTV 두 대가 자웅동체처럼 한 몸에 붙어 나를 응시한다. 바로 앞 놀이터에도, 태극기 게양대 옆에도, 배드민턴장 옆에도, 후문 놀이터에도 꼿꼿이 한 대 또 한 대 그리고 또 한 대 또, 또, 또….

꽤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너무 많은 CCTV에 놀란다. 출근길 너무 잦은 출몰에 CCTV를 기록하는 손이 금세 시립다. 항상 다니던 길로 걷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 마주친 CCTV를 모두 세봤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68대다. 교회 건물과 주차장, 횡단보도, 둑길, 보쌈집, 카페 등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잠깐씩 끊김이 있지만 생방송으로 출근길을 내보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CCTV 시야에 들지 않는 ‘자유구역’(Free Zone)은 거의 없다. 지하철 역사는 3차원(3D)으로 재생할 수 있을 만큼 CCTV 홍수다. 그나마 객차 안은 자유다. 옆자리와 맞은편에 앉은 승객들이 보는 스마트폰이 언제든 CCTV를 대신할 순 있겠지만.

처음 한두 대 설치할 때는 곳곳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지만, 어느새 잠재적 범죄로부터 안전과 보호란 논리가 득세해 CCTV의 온갖 활약이 부각되는 세상이다.

나를 노려보는 CCTV를 나도 노려볼 수 있지만, 진짜 무서운 녀석은 GPS(위성항법장치)다. 스마트폰이 켜진 한 끊김 없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는지 추적한다. GPS는 자유구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8시10분에 한 부서원의 출근을 알리는 쪽지가 날아왔다. 앱을 실행하자 안내문이 뜬다. “GPS가 꺼져 있습니다. 하단의 GPS 켜기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GPS를 켜자, 구글 맵에 놀랍게도 아파트 동까지 정확히 가리키는 빨간 점이 뜬다.

거의 항상 켜놓은 채 살면서도 GPS를 거의 의식하지 않던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52시간 근태관리 솔루션’이라고 홍보하는 앱을 깔면서다. 찜찜한 기분이 들 때마다 일부러 꺼놓기도 하지만, 앱에 출근시간을 표시하려면 꼼짝없이 GPS를 켜야 한다.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누군가 지켜본다는 느낌은 불편하다. 잘못한 게 있는지 없는지 센서가 양심을 계속 시험하는 기분마저 든다.

GPS는 선의에 붙어 기생한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과 맞물려 노사가 동의해 수많은 사업장에서 채택한 ‘통합 근태관리 솔루션’은 노동시간 단축이란 명분의 옷을 입고 있다. 얼마나 일하는지 정확히 재야 노동의 단축도, 연장도 논의할 수 있다는 명분에 ‘지금 당신은 진짜로 일하고 있는가’란 의심이 비집고 들어왔다. 회사는 당사자 외에 위치 정보를 볼 수 없다고 안심시키나, 앱이 의도한 건 다르다. “사내 PC를 이용한 출퇴근, 지문이나 사원증을 이용한 출퇴근 기록 방법 등은 대리 출퇴근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 이러한 부정 출퇴근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GPS 조작 앱을 통한 부정 출퇴근 시도 차단.” 관리자가 노동자의 위치를 확인할 목적으로 앱에 GPS를 탑재했다는 홍보이자 자랑이다.

안전, 보호, 편리, 노동시간 단축, 가짜 노동 퇴출. 여러 ‘선의’에 조금씩 자리를 양보한 우리의 자유는 어느 순간 개별적 혹은 집단적 파국으로 귀결될지 모른다. “빅 브러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조지 오웰) 한때 섬뜩하게 다가왔던 이 문장이 친숙해진 건 아닌지 겁난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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