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7호 표지 그림(오른쪽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웅크리듯 꿈틀거리듯 기묘하게 뒤엉켜 있고, 그 틈으로 사람 눈처럼도 보이고 여성 성기처럼도 보이는 ‘어떤 것들’이 프레임 밖을 응시하는 그림입니다. 표지 그림이 “너무 멋있다… 그런데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사실 기자도 무슨 함의가 있는 그림인지 몰랐습니다. 그저 ‘아빠 성폭력 생존자의 심리가 표현된 그림’이라고만 알았습니다.
그림의 작가는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 국민청원을 올리셨던 푸른나비(50대·가명)님입니다. 8살 때부터 10년간 친아버지한테 성폭력을 당한 생존자입니다. 화가가 아니고, 미술 교육도 받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피해를 당할 때, 아버지한테 맞아서 벽지에 피가 튄 날엔 그걸 감추려고 자신의 피로 리본이며 인형이며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했던 게 전부입니다. 표지 그림은 딸이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딸 선생님의 권유로 그려본 습작입니다. 두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그리고 나니 “너무 적나라하고 무서운 그림”이어서 놀라고 민망했다고 합니다.
푸른나비님은 아버지에게서 성폭력을 당했던 10년 중 가장 처참했으리라 짐작되는 4년의 기억을 지웠습니다. 전문가들이 ‘해리’라고 하는 현상입니다. 푸른나비님은 “기억 속에 뭔가 있어서 그린 것 같은데, 무의식중에 그린 그림이라 뭘 그린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고 어떤 이는 아픔을, 어떤 이는 원초적 생명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푸른나비님에게도 복잡한 감정을 들게 하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기자가 메시지로 표지 사진을 찍어 보낸 뒤, 푸른나비님은 한참이 지나서야 답문자를 보내셨습니다. “너무 울다 이제 확인했어요. 엄마가 그림 그리면 목매달아 죽을 팔자 된다고 했거든요. (돈 들까봐) 그림 못 그리게 하려는 말이었는데… 습작으로 그린 게 잡지로 나오니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오네요. 통곡이었어요. 이제야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제게 잘 살아가라고 해주신 것 같습니다.”
푸른나비님은 이후 통화에서 “엄마의 저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고 했습니다. ‘내 몸을 만진 더러운 손’처럼 느껴졌던 그림 속 손이 ‘(친족 성폭력 생존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민 손’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푸른나비님은 “평소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표지 사진을 받고 하루 종일 울었다”고 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겼던 어린 시절, 푸른나비님 주변에는 그의 말을 들어줄, 믿을 만한 어른 ‘한 명’이 없었습니다. 푸른나비님은 “저희처럼 고아 같은 사람들은 ‘따뜻한 순간’을 만나면 금방 살아나는데, (이) 제 말을 들어주고 영혼을 살린 것 같다. 사람 하나 살리셨다”며 또 우셨습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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