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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노예들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01-05 14:33 수정 2020-05-03 04:29

아서 래퍼란 경제학자가 있다. 사실 어떤 학자인지 잘 모른다. 다만 대학 때 봤던 책에 나오는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어느 날 미국 워싱턴DC 식당에서 그가 즉석에서 냅킨에 그렸다는 래퍼 곡선. 한마디로 세수는 세율이 높아지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하락한다는 이론이다.

늙은 학자의 이론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로널드 레이건은 래퍼를 부적 삼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감세 정책을 폈다. 세율을 낮춰 경제를 성장시키면 세수가 늘어난다는 주문이었다. 이념적, 정치적 주문은 현실에선 통용되지 않았다. 되레 미국은 세계에서 빚이 가장 많은 국가가 됐다.

래퍼 곡선을 보면, 케인스의 말이 떠오른다.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을 때나 틀릴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래퍼 곡선은 어느 경제학자가 ‘사이비 이론’이라고 몰아붙일 만큼 현실성 없는 것이었으나, 그 이론의 ‘노예’들은 넘쳐났다. 유령이 된 경제학자의 노예는 한국 학계와 언론계에도 넘쳐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주도권을 쥐기도 했다.

최저임금 인상은 지난 한 해 최고의 경제 뉴스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서 이렇게 논란이 컸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새해에도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어느 보수신문은 ‘문 정부 3년차, 경제부터 이념에서 실질로’란 제목의 사설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근거로 한국 경제가 “초유의 사태로 첫날을 맞았다”고 잔뜩 의미를 부여했다. 사설은 이어 지난해 한국 경제가 ‘이념적 가치’ ‘정치적 계산’ ‘포퓰리즘’으로 망가졌다고 통곡한다. 그런데 보수·경제지들이 쏟아내는 기사들을 보면 정작 자신들이 최저임금 문제를 이념적 가치와 정치적 계산, 포퓰리즘으로 몰고 간다는 의심이 든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부작용이 없지 않으나, 한국 경제의 부진과 침체의 ‘방아쇠’로 진단하는 대목에선 어처구니가 없다. 자영업의 위기도 최저임금 탓이고, 최하위 계층의 소득 감소도 최저임금 탓이고, 고용 부진도 최저임금 탓으로 환원된다.

어느 국립대 명예교수란 분이 경제지에 쓴 칼럼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야기된 고용 하락, 물가 인상, 자영업의 몰락 그리고 소득불평등 심화 등 경제문제들이 심각하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검증된 게 없는 과장된 얘기다. 지난해 16.4% 인상된 시간당 7530원의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노동자 전체의 연간 임금 인상 총액은 7조2천억원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체 노동자 임금 총액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모든 경제문제의 최저임금 탓’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 건너편에서 태풍이 되었다는 비약이나 다름없다. 최저임금은 그 문제의 크기에 맞게 다뤄지면 된다. 그런데도 그는 “도입 의도가 아무리 도덕적이라고 해도, 최저임금제는 필연적으로 실업을 증대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정치권의 경제문맹자들은 알 턱이 없다. 노임, 노동시간 등의 문제는 시장이 할 일이고, 불의를 막아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라는 분업의 원리도 알지 못하는 정치권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훈계한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이 꽤나 인상적인데, “개인과 기업들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빼앗긴 자유’를 되돌려줘라!”고 외친다. 이 대목에서 최저임금은 정부보다 시장을 신뢰하고 규제보다 시장의 자유를 선호하는 시장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유령이란 걸 알 수 있다. 다만 래퍼는 감세주의자들이 추종하는 유령이었지만, 최저임금은 시장주의자들이 싸워야 할 유령이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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