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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와 폭염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08-07 15:51 수정 2020-05-03 04:29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철책 안 생수 두 병을 건네받는 검은 얼굴, 그 뒤 짐 보따리를 들고 걸어가는 머리에 수건 쓴 여인, 멀리 떼 지어 앉거나 하릴없이 서 있는 사람, 아무 데나 널브러진 짐과 쓰레기. 어느 아프리카 난민촌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의 실제 배경은 2005년 9월 미국 뉴올리언스 공항 임시 병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긴 재난 현장이다.

카트리나로 숨진 사람만 1836명. 카트리나를 다룬 제577호(2005.09.15)의 표지 제목은 ‘미개한 미국’이다. 미개를 붙인 이유는 이 재앙을 ‘사회적 자연재난’으로 봐서다. 뉴올리언스에 사는 흑인들은 백인보다 소득은 절반 수준이지만 빈곤율은 세 배나 됐다. 피해는 침수 위험이 큰 저지대에 살던 가난한 흑인에게 집중됐다. 피해 지역 흑인의 53%가 모든 걸 잃었다고 답했지만 백인은 19%만이 그렇다고 답했단다.

자연재해의 피해는 평등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계층의 피해가 더 컸다.

카트리나 스토리는 폭염 재난에서도 반복된다. 1995년 기온이 41도까지 치솟는 폭염으로 시카고에서 739명이 숨졌다. 숨진 사람 중 다수가 도심에 사는 가난한 노인들이었다. 냉방시설이 없거나, 있어도 전기료가 무서워 더위를 맨몸으로 견디다 화를 입었다. 2003년 프랑스에서도 대폭염으로 예년보다 1만5천여 명이 더 사망했다. 도시의 좁다란 방에 사는 홀몸노인의 희생이 컸다. 시카고나 프랑스에서나 더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피해가 집중됐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온열질환으로 숨진 이는 모두 12명이다. 이 가운데 집에 에어컨을 설치한 사람은 겨우 1명이었다. 다른 1명은 선풍기조차 없었고, 6명은 1~3대씩 있는 선풍기만 돌렸다. 나머지 4명은 냉방 기기 보유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에어컨이 없다’는 말은 드문 예외를 빼면, 에어컨을 살 돈이 없거나 비싼 전기료를 낼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6년 전보다 크게 높아진 에어컨 보급률은 이제 80%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는 40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430만 가구가 여전히 선풍기와 부채에 의지해 더위를 피한다는 끔찍한 수치다.

폭염은 불평등 재난이다. 소득이 적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온열질환 발병률은 다른 계층보다 3배쯤 높다는 연구도 있다. 좁은 집에 살거나 에어컨이 없거나 아픈 노인이거나 건강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만성질환자이거나, 다 폭염이란 재난 앞에 취약한 사람들이다.

카트리나 재난 때 흑인의 피해가 컸던 까닭 중 하나는 홍수 대피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뉴올리언스 가구의 30%가 차가 없었는데, 그 가운데 3분의 2가 흑인이었다. 앞으로 폭염은 우리에게 더 큰 재난으로 다가올 수 있다. 4년 전 행정안전부는 2050년이면 폭염 일수가 지금의 3~5배로 늘어난다고 예측했다. 예고된 큰 재난 앞에서 우리는 취약계층에게 어떤 대피 수단을 마련해줘야 할까. 폭염 사망자가 이미 35명(8월3일 기준)을 넘어선 지금, 답을 내야 한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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