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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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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황유미

등록 2018-06-12 16:27 수정 2020-05-03 04:28

2003년 입사 당시 건강했던 황유미씨의 몸무게는 몇 년 뒤 20㎏대로 줄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때문이었다. 유미씨는 2007년 어느 봄날 23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3라인에서 반도체 생산직으로 일했다.

2009년 입사했을 때 건강에 아무 이상 없던 K씨의 몸무게는 지금 39㎏이다. 유미씨와 똑같은 질병을 앓고 있다. 그는 지난해 2월까지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이었다.

K는 또 하나의 황유미다.

아프기 전 두 사람에게 회사는 자랑거리였다. 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초일류기업에 입사한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택시 기사인 아버지에게 딸은 새 택시를 선물하고 싶어 했다.

K씨의 첫 직장은 공공기관이었지만, 꿈꿨던 항공기 승무원으로 미련 없이 항로를 변경했다. 병상에 누운 그는 지금도 비행하는 꿈을 꾼다.

두 사람이 아프자, 회사는 더는 그들이 알던 회사가 아니었다. 영화 은 이를 압축해 보여준다. 유미(극중 한윤미)씨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K씨의 삶이기도 하다. 영화 속 진성반도체는 삼성전자만이 아니라 대한항공이기도 하다. 아파 집에 누워 있는 한윤미에게 회사 쪽 사람이 찾아와 ‘죄송하다’며 요구한 건 퇴사였다. 회사는 또 500만원을 미끼로 산업재해 신청을 무마시키려 했다. ‘산재가 뭐냐’고 묻는 한윤미의 아빠에게 회사 쪽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한테 병에 걸린 책임을 돌리는 거 있지 않습니까.”

10만 명에 한 명꼴로 걸린다는 백혈병이 한윤미의 동료 다섯에게 나타났지만 회사는 “자기가 병에 걸린 걸 갖고서 왜 남 탓을 하냐. 증거 있냐”며 털끝만큼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이는 황유미씨가 부딪힌 현실 그대로다. 또한 K씨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갑작스레 찾아온 백혈병에 대한항공의 퇴사 종용이 뒤따라왔다.

유니폼에 가려진 K씨의 노동환경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화려함과 달랐다. 무엇보다 방사선이 위험했다. 황유미씨의 발병과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로 법원이 인정한 것도 방사선이었다. 북미 동부에서 한국으로 귀항시 10㎞ 넘는 고도에서 북극 항로를 이용한다. 이때 우주방사선 쐬는 양이 크게 늘어난다. 국제선 탑승시 엑스레이 검색대를 매번 통과하는 건 기본이다. K씨는 방사선에 크게 노출되는 업무가 백혈병이란 재해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의학적 소견을 덧붙여 산재를 신청한다.

대한항공은 우주방사선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이 유미씨에게 전리방사선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처럼 대한항공도 K씨에게 그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

투병 중인 K씨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이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유미씨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11년째, 아빠는 아직도 싸운다. 황상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과장님 하시는 말씀이 ‘아버님이 이렇게 큰 회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길 수 있으면 한번 이겨보시오.’” 7년 만에 법적 승리를 거뒀지만, 그는 거의 1천 일째 삼성전자 본사가 있는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에게 삼성이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제 없는 투명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껏 확인된 삼성전자 반도체/LCD(현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 피해자는 236명, 그 가운데 80명이 숨졌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집계한 직업병 피해 제보 수치다. 제2, 제3의 황유미가 계속 죽어나가고 있다.

K씨가 산재를 신청한 이유 중 하나도 제2, 제3의 K를 막기 위해서다. “이건 저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많은 동료를 위해서라도 해야 돼요.”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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