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의해 움직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력을 일일이 평가한 뒤에 그의 정치를 판단하는 게 아니다. 그 어머니를 떠올리며 측은지심을 품거나, 그 아버지를 연상하며 경계한다. 그 뒤에야 ‘이성적 근거’를 주워 모아 직관을 합리로 무장한다. 감성은 몸뚱이고 이성은 갑옷이다. 그래서 혁명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수많은 이성의 연결망이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불타오른 결과다.
테러방지법의 악마성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는 몇 달 전부터 제출됐다. 그러나 대중은 감성의 시간에야 움직였다. 국회의원들이 혼신을 다해 반대에 나서자 비로소 대중은 ‘무엇이 문제인지’ 들여다보았다.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 정국은 차가운 정치를 뜨겁게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호감이 무르익어 애정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를 끝냈다. 김종인 당대표가 구상하는 총선 전략과 연계된 결정으로 보인다. 경제 파탄을 감추려고 ‘대북 의제’로 선거를 치르려는 새누리당에 맞서 ‘사회경제 의제’를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 의제’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이번 결정은 새누리당의 과거와 비교된다. 2005년 12월, 열린우리당이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자,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장외투쟁을 벌였다. 새해 예산안 처리까지 거부했다. 모든 정기·임시 국회 일정에 딴지를 걸었다. 2007년 6월 여야가 재개정에 합의하고 나서야 ‘투쟁’이 끝났다. 1년6개월 동안 법안 하나에 모든 정치 에너지를 쏟은 것이다.
당시 박 대표가 했던 말이 있다. “뺨을 때리고 발길질하고 ‘너 죽어라’ 나서는데, 맞아죽을 때까지 참아야 하느냐. 자유민주주의 뿌리까지 뽑아버릴 엄청난 법을 날치기 통과한 정권에 대해 ‘우리가 맞아죽겠습니다’ 하며 있을 수는 없다.”
법안과 제 정치 생명을 동일시하여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정치는 감성의 정치다.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민주당은 이를 흉내낼 수 있는 기회를 잠깐 손에 쥐었다가 고만 놓아버렸다.
3월3일부터 시행된 테러방지법은 ‘계엄령 또는 긴급조치의 일상화’다. 무엇이 테러 또는 테러 예비인지 국가정보원이 자의적으로 결정한다. 타깃으로 찍히면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 개인의 모든 것을 감시하여 마침내 체포한다.
‘착하게 굴 테니 안심하라’고 국정원은 강변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국정원 관련 사건은 그것이 거짓임을 웅변한다. 국정원은 기자들을 도·감청했고, 대선에 개입해 댓글을 달았고,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양지로 드러난 모든 사례를 종합하면, 국정원은 무능 기관이거나 음지에서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민주당의 이번 결정이 (테러방지법 논란에 냉소적인) 중도층을 끌어안겠다는 선거 공학적 판단이라 해도, 그 적실성은 의문이다. 예컨대 유신헌법 아래서 사회경제 공약을 내건다고 야당이 수권할 수 있었을까. 국정원이 국민을 감시·통제할 수 있는 체제에서 무슨 수로 야당이 다수석을 차지할 것인가.
사학 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한 한나라당은 1년6개월을 싸웠다. 국민 보편, 나아가 헌법 체제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한 민주당은 190여 시간만 싸웠다. 필리버스터로는 세계 신기록이지만, 법안 투쟁과 관련해선 국내 기록에 한참 못 미친다.
(국정원이 얼마든지 뒤져볼) 내 휴대전화에서 텔레그램 신규 가입자를 알리는 메시지가 계속 울리고 있다. 인간은 감성에 의해 움직이므로 이미 그들의 마음은 감시국가를 떠나 이민 가버렸다. 그들이 과연 ‘사회경제적 수권 능력’을 믿고 투표장을 찾을까.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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