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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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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등록 2015-05-12 17:11 수정 2020-05-03 04:28

나는 ‘참교육 세대’다. 전교조가 창립하던 1989년, 고등학생이었다.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 가운데 허술한 사회의식을 섣부른 행동으로 옮기던 이들이 있어 ‘고등학생 운동’이란 걸 잠시 벌여보았다. 그러다 친구 하나가 죽었다. 고 김수경. 대구 경화여고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던 그는 (전교조 반대) 교사들의 폭언·폭행을 견디다 못해 1990년 6월, 투신자살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1시간여 버스를 타고 어느 대학 건물 옥상을 찾아가 뛰어내렸다. 친구들이 모여 작고 초라한 노제를 지내던 날, 실핏줄까지 떨리던 적개심의 크기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마음에는 마르지 않는 슬픔의 샘이 생겨 오늘에 이른다.

이후 버릇도 생겼다. 죽은 이의 마지막 몇 시간을 자꾸 되짚는다. 왜 그곳에 갔을까. 왜 그 방법을 골랐을까. 왜 그 글을 남겼을까. 그날의 그가 되어 얻어맞고 분노하여 버스를 타고 대학 캠퍼스에 도착한다. 그렇게,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이들의 최후를 추체험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죽은 이가 적개한 대상을 환기한다. 징죄는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순결한 친구의 죽음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지만,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했을 때 버릇이 도졌다. 그를 따라 북한산을 오르며 흉중에 이글거렸을 적개심을 상상했다. 경험과 사례를 종합하자면, 상당수의 자살은 복수다. 수치와 낙담만으로 죽지는 않는다. 자살을 격발하는 것은 적개심이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나와 너를 합일시키려는 에로스의 이면에 나와 너를 동시에 절멸시키려는 타나토스(죽음충동)가 있다. 애착했던 누군가를 증오할 때, 타나토스가 인간을 지배한다. 직접 복수할 방법이 없을 때, 충동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내가 죽는 것, 그리하여 그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그것만이 복수의 길로 여겨지는 것. 그래야 정의가 구현된다고 믿는 것.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한 달이 지났다. 그의 죽음은 배신당한 애착에 대한 복수다. 그가 남긴 유서와 메모는 과거에 애착했던, 이제 복수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들이 자신만큼 고통스럽기를 그는 바랐을 것이다.

검찰은 그 이름을 따라가고 있다. 검찰은 정치 논리를 법 논리로 포장하여 움직인다.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정치 논리를, 징죄할 증거가 마땅치 않다는 법 논리로 치환하여 공표할 것이다. 결국 도마뱀 꼬리 자르기가 될 것이다. 또한 많은 언론은 어느 정치세력에 유불리한지 중계보도할 것이다. 그렇게 이슈는 소비되고 성완종의 죽음은 정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성완종이 남긴 8명의 이름은 친박 또는 여당 중진이 아니라 정경유착에 대한 것이다. 그는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유착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여러 차례에 걸친 경남기업 회생 과정에 비밀이 숨어 있다. 언론이건 검찰이건 그 실체가 궁금하다면, 리스트가 아니라 정치와 기업이 유착한 전모를 샅샅이 뒤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짜 검찰이고 언론일 것이다.

아직 우리의 힘이 미력하여 실체를 모두 파헤치진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향방이 ‘진영 논리’ 또는 ‘게임 중계’로 변질되는 듯한 국면에서 우리는 다시 몰입해보았다. 송호진 기자의 주도로 ‘경남기업 특혜 과정’을 추적·분석했다. 성완종은 순결하지 않지만, 적어도 정의를 호소하며 죽었다. 나머지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다시 성완종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추신: 혹여 영혼이 흔들리는 이가 있다면 충고하고 싶다. 검찰에 출두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얼굴을 보라. 몸부림치며 죽어간 이를 느끼는 ‘통각’이 결여돼 있다. 살아남아라. 어차피 그들은 당신의 고통에 아무 관심이 없다. 복수를 위해서라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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