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 동안 이어진 대환장의 체포 거부가 일단락됐다. 12·3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은 끝까지 추악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내란을 지휘했다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자신이 일으킨 죄악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으며, 단 한 번도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든 책임 앞에 의연하지 못했다. 심지어 윤석열은 체포 당시에도 시민 앞에 당당하게 서지 않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청사 후문으로 몰래 들어갔다. 사진기자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경호처 차로 입구를 가려놓고 도망치듯 청사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윤석열의 추악함을 보여주는 절정 같았다.(다행히 이 추악한 장면을 한겨레21 이종근 선임기자가 “셔터스피드 1000분의 1초 연속셔터로” 홀로 포착했다.)
윤석열의 퇴장은 4·19 혁명 이후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라며 미적대다 국회의 사임서 수리 이후에야 하야했던 독재자 이승만, 검찰 수사가 닥쳐오니 ‘골목성명’을 내놓고 고향인 경남 합천에 가서 일가친척들과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뻗대다가 뒤늦게 검찰 소환에 응한 내란 우두머리 전두환만도 못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승만과 전두환은 스스로 하야하거나 소환에 응했다. 반면 윤석열은 43일 동안 한남동 관저를 요새로 만들어놓고 온갖 법적 궤변을 늘어놓으며 수사에 협조하지 않다가, 체포 직전에야 자진 출석을 내걸고 옹색한 타협을 요구했다. 타협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계엄군의 총칼을 동원해 민주주의와 시민의 생명을 억압하려 했던 압제자에게 너무나 평화로운 체포를 허용했다는 점에서도, 윤석열의 퇴장은 최악으로 기록할 만하다.
그럼에도 윤석열의 체포는 43일 동안 ‘남태령 대첩’과 ‘키세스 시위대’를 만들어낸 시민들의 승리다. 시민들은 친위 쿠데타가 끝난 순간 곧장 윤석열을 체포해야 했을 군이나 검경 등 수사기관이 온갖 형식적 사유를 들어가며 체포를 미적대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거리에 나와 정치권과 군, 수사기관의 엘리트들을 압박했다. 여의도에서 응원봉을 든 시민이 200만 명이나 결집하지 않았다면 윤석열 탄핵은 실패했을지도 모르고, 한남동 관저 앞에서 은박담요를 덮어쓰고 폭설을 맞으면서도 밤샘시위를 한 ‘키세스 시위대’가 없었다면 윤석열 체포는 계속 지리멸렬했을지도 모른다.
여의도와 남태령, 한남동 거리에서 시민들은 “윤석열을 비호하는 법조인들보다 헌법 정신을 더 생생히 감각”했고,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또 다른 시민들과 부대끼고 공명하고 연대하며 “민주주의를 ‘아는 것’을 넘어 ‘감각’하게”(이번호 노땡큐) 됐다. 그러니까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트랙터 농민들과 연대하기 위해 남태령으로 달려가고,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 옥상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1년째 농성 중인 박정혜·소현숙 노동자에게 생수를 보내고,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을 위해 ‘전태일벽돌기금’을 갹출하는 건 어떤 지식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감각 때문이다.
시민들 사이에서 ‘윤석열 탄핵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더 많은 변화를 원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우연히 연결된 이 감각을 쉽게 잊고 싶지 않기 때문 아닐까. 추악한 내란범이 퇴장하면서 한국 사회에 남은, 그가 절대 원치 않았던 아름다운 결말이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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