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단히 훌륭한 지도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은 꾸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21년 가을, 각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벌어질 무렵이었습니다. 한 캠프에 몸담은 전 공직자에게 ‘왜 그 캠프에 들어갔느냐’고 사석에서 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라에 해가 덜 가게 할 지도자,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할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지 후보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없다’는 취지의 답변이었습니다. 대개 자신이 속한 캠프 후보를 변호·미화하는 얘기를 많이 듣던 때라, 이 회의적인 태도는 당시 제 뇌리에 남았습니다. 노년의 공직자가 여러 정부를 오래 관찰한 끝에 내린 결론인가도 싶었습니다.
그 태도가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자세가 우리를 ‘정치혐오’에 쉽게 빠지지 않도록 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들 하죠. 제1482호 표지이야기 ‘무당층의 마음을 읽다’ 취재를 위해 만난 무당층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양당이 어떻게 유권자를 실망시키는지 토로했고, 소모적인 극한 대립에 지쳐 정치혐오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유권자는 정치혐오를 느끼다 못해 “내년 총선에서 절대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대’라고 말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스페인 철학자 페르난도 사바테르가 저서 <정치 최대한 쉽게 설명해드립니다>에서 한 꾸짖음을 되새깁니다. 그는 “정치는 더러운 장사이고,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은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 똑똑하지 못한 짓”이라고 말합니다. 투표 참여로 우리가 얻을 이득은 분명 불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정치를 혐오하고 외면한다면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삶이 예속”되는 상황을 낳을 뿐이니까요. 그는 정치참여와 관련해 이런 말도 했습니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숙고해야 하고, 과거와 단절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추구해야 하고, 당면한 일과 이것을 가장 잘 실천할 사람을 선택해야 하고… 모든 개인이 이런 문제로 끊임없이 노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다니 이 얼마나 힘든 일이냐!” 정치참여란 애초에 행복과 거리가 먼, 아주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새 국회의원을 뽑는 2024년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정치가 마음에 안 드는 다수의 무당층 유권자의 정치적 이상은 너무 완벽한 게 아닐까요. 민주주의가 보장해주는 유일한 것은 ‘더 많은 갈등’과 ‘더 적은 평온’뿐이랍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희대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젠 이상을 좀 내려놓고, 6개월간 다양하게 보고 들으며 ‘끊임없이 노고를 아끼지 않으려’ 합니다. 독자님도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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