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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한테 주고 남은 사과

등록 2021-11-13 23:49 수정 2021-11-13 23:49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021년 11월10일 광주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참배하려다 시민들에게 가로막혀 멈춰선 채 눈을 감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021년 11월10일 광주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참배하려다 시민들에게 가로막혀 멈춰선 채 눈을 감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무릎 사과도,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는 사과도 없었다. 350자 남짓의 짧은 사과문만 있는 ‘사과’였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2021년 11월10일 광주 5·18민주묘지 방문은 이렇게 요약된다. 윤 후보는 ‘전두환 미화’ 발언을 하고, ‘개 사과’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등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윤 후보가 5·18민주묘지에서 무릎 꿇고 사과할 것인지, 상처받은 광주시민의 마음에 가닿는 사과를 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2020년 8월 김종인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부끄럽고 죄송하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며 무릎 사과를 했다. 당시 김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당내 인사들(김진태·이종명·김순례 전 의원)의 5·18 망언에 대해 사과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대통령 보좌 기관으로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자신이 참여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그는 1300여 자에 이르는 사과문을 읽으며 여러 차례 울먹이기도 했다. 당시 5·18민주묘지 현장에서는 “망언 의원조차 제명하지 않고 광주에 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항의하는 이도 있었지만 몇몇 광주시민은 “감사하다”고 박수 치며 환영했다.

이런 모습과 윤석열 후보의 사과는 많은 면에서 선명하게 대비됐다. 애초 윤 후보는 대선 후보 확정 전인 11월 초에 광주를 방문하려 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나 광주 등에서 달걀 맞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정치쇼’라는 비판이 나오자 사과의 취지가 왜곡될 수 있다며 방문을 연기했다. 경선 직전에 말실수 위험을 줄이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나왔다.

11월10일 오후 4시15분께 5·18민주묘지에 도착한 윤 후보는 추모탑으로 향했지만, 항의하는 시민과 오월어머니회 유족이 길을 막았다. 결국 추모탑 30여m 앞에서 걸음을 멈춰, 윤 후보는 “제 발언으로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준비해온 사과문을 낭독했다.

사과문은 간결했고, 구체성은 떨어졌다. 5·18 단체들이 사전에 요구했던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약속도 사과문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윤 후보는 사과문 낭독 이후 만난 취재진 앞에서 이에 대해 언급했다. 5·18기념재단과 오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는 “지극히 실망스럽다. 사과를 받아야 할 5·18과 시민은 참으로 어이없다. (윤 후보의) 사과 행보는 지극히 일방적이었다. ‘사과를 받든지 말든지 나는 나의 일정대로 갈 뿐’이라는 오만함마저 느껴진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날 윤 후보의 광주 방문은 대선 후보 선출 닷새 만에 이뤄진 첫 지역 일정이었다. 5·18 망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예정된 사과 행보였지만, 중도 확장을 위한 포석이라는 의미도 있다. 역대 대선에서 보수 후보들이 호남 지역을 중도 확장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선거와 정치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오월 3단체는 “일방적이고 오만하다”고 평가했지만, 윤 후보는 기자들에게 “저는 쇼 안 한다. 오늘 사과로 끝난 게 아니라 이 마음을 계속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는 공약과 5·18 망언을 한 전 의원 3명에 대한 출당·제명으로 ‘쇼’가 아님을 입증하길 바란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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