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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 ‘딩동댕’, 송해

등록 2022-06-10 15:57 수정 2022-06-10 22:53
국민 엠시(MC) 송해가 향년 95로 별세한 2022년 6월8일, 서울 종로구 ‘송해길’을 찾은 시민들이 고인의 동상 앞에서 명복을 빌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국민 엠시(MC) 송해가 향년 95로 별세한 2022년 6월8일, 서울 종로구 ‘송해길’을 찾은 시민들이 고인의 동상 앞에서 명복을 빌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아버지는 매주 일요일 낮 12시가 되면 텔레비전 채널을 KBS로 돌렸다. “전국~노래자랑”이란 외침과 함께 나오는 ‘빠라밤빠빠빰밤 빠라라빠밤~♬’ 특유의 멜로디가 집을 가득 채웠다. “<출발 비디오 여행>(MBC, 1993년 방송 시작)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자식들의 애원에도 <전국노래자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이 삐죽 나온 자식들도 어느새 무대 위 진행자의 구수한 입담에 빨려 들어갔다.

“전국~노래자랑”을 매주 외치던 국민 엠시(MC) 송해가 2022년 6월8일 별세했다. 향년 95.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티브이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등 그를 수식하는 말이 많지만, ‘송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그는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송해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대중문화 발전사와 얽혀 있다.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를 다니며 선전대 활동을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피란길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월남했다. 1955년 창공악극단에 입단해 희극인의 삶을 시작했다. 구봉서·서영춘·배삼룡 등과 함께 무대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진행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22살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픔을 딛고 1988년 시작한 <전국노래자랑>으로 그는 온 국민의 엠시가 됐다. 영 맵시가 나지 않은 양복 재킷을 입고 마이크를 잡은 이장님, 긴장해서 음이탈을 해버린 미용사, 엄청난 성량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호떡집 아주머니…. 돈 있고 힘 있는 사람 빼고 동네에서 흔히 보는 장삼이사들이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올랐다. 그들의 아버지, 형님, 오빠가 돼 툭툭 던지는 한마디로 긴장을 풀어주고, 좌중을 웃고 울게 한 ‘송해의 마법’은 전국의 일요일을 사로잡았다.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 그가 2018년 내놓은 노래 <딴따라>의 한 대목이다. 그는 하늘에서도 ‘딴따라’로 사람을 따라, 풍악을 따라 여기저기를 다닐 것만 같다. 송해는 자신의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하는 일을 생전 소원으로 여겼는데, 하늘에서는 그 바람을 이뤘으면 한다.

남은 우리는 그가 없는 낯선 <전국노래자랑>을 마주하게 됐다. 그가 없어도 보통 사람들은 매주 무대 위로 올라와 울고 웃고 할 것이다. “‘땡’과 ‘딩동댕’ 뭐가 더 소중하냐고 하는데, ‘땡’을 받아보지 못하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2022년 1월31일 KBS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에서 송해가 한 말) 무수히 ‘땡’을 받으며 ‘딩동댕’을 꿈꾸는 이들의 마음속에 송해는 계속 자리잡을 것이다.

이승준 <한겨레> 이슈팀장 gamja@hani.co.kr

*뉴노멀: 이주의 주요 뉴스 맥락을 주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코너로 <한겨레> 김규남, 이승준, 장수경 기자가 돌아가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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