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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반사

등록 2022-05-14 02:02 수정 2022-05-14 08:29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반지성주의’라는 낯선 단어가 대통령 취임식장에 불쑥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5월10일 취임사에서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다. (…)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4년 퓰리처상을 받은 자신의 저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처음 개념화했다. 그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매카시즘(무분별한 반공주의) 광풍을 비판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다. 이후 반지성주의는 매카시즘을 비롯해 파시즘, 트럼피즘, 일본의 넷우익, 한국의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등 극우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사용됐다.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에 대해 “엄밀하거나 협애한 정의가 다소 부적절하다”며 정의를 내리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 용어는 ‘지식인·지성에 대한 경멸, 반엘리트주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한편, 반지성주의는 우파의 공격 논리도 됐다. 미국의 우파 지식인들은 1960년대 대학생들이 기본적인 지성을 갖추지 못한 채 정치투쟁에만 골몰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2004년 10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박근혜 정부 때 KBS 이사장)가 “현 정부 출범 이래 가장 두드러진 사회 변화는 반엘리트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표출”이라고 노무현 정부를 겨냥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 비판 대상을 ‘정치’로 뭉뚱그려 말했지만, 실제 그 대상은 그가 정치인이 된 이후 줄곧 비판해왔던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5월11일 “윤 대통령에게 가장 결핍된 언어가 ‘지성’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여성가족부는 폐지해야 하며, 외국인 건강보험은 개선하겠다며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게 바로 반지성주의다. 온갖 편법을 동원해 딸이 가짜 스펙을 쌓도록 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동성애를 정신병이라 하고 ‘위안부’ 피해자 피해보상금을 ‘밀린 화대’라고 비하한 김성회 대통령비서실 종교다문화비서관 등도 모두 반지성주의자들이다.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려면 이들을 모두 정리하라”고 반지성주의 비판을 ‘반사’하는 방식으로 윤 대통령에게 돌려줬다.

윤 대통령은 5월11일 첫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어제 취임사에서 ‘통합’ 이야기가 빠졌다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는데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통합은 우리 정치 과정 자체가 국민 통합의 과정이다. 나는 통합을 어떤 가치를 지향하면서 할 것이냐를 얘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향후 5년 임기의 청사진을 담은 취임사에서 통합에 대한 비전은 누락한 채 추상적인 개념어를 구사하며 통합의 한 축인 야당을 에둘러 비판한 데 대한 설명치고는 옹색하다. 윤 대통령이 대선 기간 국민 통합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등 통합을 잇달아 강조해왔던 터여서 더욱 그렇다.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를 비판했지만, 자신이 바로 그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지 성찰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합은커녕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내내 비판했던 ‘분열’을 자초할 것이다.

김규남 <한겨레> 스페셜콘텐츠부 기후변화팀장

3strings@hani.co.kr

*뉴노멀: 이주의 주요 뉴스 맥락을 주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코너로 <한겨레> 김규남, 이승준, 장수경 기자가 돌아가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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