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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회피형 리더십

안희정
등록 2017-02-28 15:38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안희정 충남지사의 말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비난이 폭주했다. 탄핵 절차에 있는 박 대통령을 두고 “선의” 운운한 건 ‘선’을 한참 넘어갔다는 평이다. 안 지사는 ‘현장에서 반어법과 비유로 이야기했는데 기사화되면서 오해를 샀다’며 언론 탓을 했다. 설상가상 한 방송사와의 대담에서 발언을 해명하며 “통섭” 운운한 것이 구설에 올랐다. 결국 그는 사과해야 했다.

부산대 발언, 해명, 방송사 대담 등을 살펴본 결과, 그의 발언은 전략적 수사로 보이지 않는다. 즉, 중도·보수 세력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다 안희정이라는 정치인의 본질적 면모로 보인다. 이걸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갈등회피’다.

그가 다양한 이슈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갈등회피’라는 말로 전부 설명 가능하다. 처음에는 그가 ‘안정 희구 세력’에 어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런 태도를 연출한다 여겼다. 지금도 그 의구심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며 차츰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정말로 갈등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대연정을 언급하면서 그런 면모가 비쳤다. ‘통섭’ 같은 관념적 이야기를 하며 ‘비판적 사고는 낡은 20세기적 사고’라고 말하는 데서도 이런 모습이 강하게 배어 있다.

안 지사의 권력의지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권력을 가짐으로써 어떤 가치를 실현할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모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의 대선 출마선언문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 “경제에 관하여 저는 특별히 새로운 청사진을 내놓지 않습니다. 지난 여섯 명의 대통령이 펼친 정책을 이어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토지공개념,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전략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대통령의 IMF 극복과 IT산업 육성, 노무현 대통령의 혁신경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성장,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입니다.”

노태우의 토지공개념은 구체적 정책이라기보다 원칙이다. 이를 어떤 정책으로 계승하고 강화할지가 핵심이다. 김영삼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본격화, 김대중·노무현의 혁신경제는 일자리 없는 성장과 양극화로 이어졌다. 이명박의 녹색성장은 토건경제를 통한 생태 파괴였으며,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어느 미국 경제학자의 말처럼 그냥 “헛소리”(bullshit)다. 안 지사의 대선 출사표에는 통찰과 시대 인식은커녕 참여정부 시기 불평등 확대에 대한 일말의 성찰조차 보이지 않는다. 개천용 신화(능력주의)를 아무 의심 없이 좇겠다는 이야기를, 제로성장·탈성장 시대의 대안을 고민하는 2017년에 태연히 하고 있다.

출마선언문은 여러모로 문제적 텍스트였다. 압권은 “공짜 밥” 발언이다. “세금을 누구에게 더 나눠주는 정치는 답이 아닙니다.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습니다. 근로능력을 잃었을 때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원합니다. 시혜적 정치와 포퓰리즘은 이제 청산돼야 합니다.” 복지를 “공짜 밥”으로 묘사하는 건 극우세력과 경제신문의 단골 멘트다. 더 황당한 건 다음 문장이다. “근로능력을 잃었을 때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원합니다.” 종합하면 근로능력 없는 이에게도 “공짜 밥”은 없다는 얘기인데, 그럼 품위 있게 굶어 죽으라는 것인가.

안 지사는 정책 성향 스펙트럼에서 남경필 경기지사, 유승민 의원보다 오른쪽에 있을 정도로 보수적 스탠스를 보였다. 실제 사드 배치나 재벌개혁 의제에서 우파적 발언을 거듭해왔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를 일단은 보장하는 사회이고 민주당은 원래부터 보수정당이었으니 안희정 후보의 성향을 그 자체로 문제 삼긴 어렵다. 문제는 안 후보가 우파라는 점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비전과 이를 떠받치는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안희정의 “통섭”을 정치언어로 번역하면 ‘통합’ 또는 ‘포용’이다. 이건 강자의 논리다. 한국의 대통령이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 불린다지만 무슨 절대권력이라 착각하면 오산이다. 그 시행착오를 이미 안 지사의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여줬다. 안 지사는 다음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자본권력 같은 사회의 강자들, 기득권과 갈등하지 않고 사회를 개혁할 방법이 있는가?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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